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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역사 33편 화폐의 발달 과정 서양 고대사11

by cellife 2024.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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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내전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서양 고대사10 

 

투키디데스는 그리스 세계에서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패권 경쟁이 어떻게 시작되다. 그는 아테네의 부상에 따른 스파르타의 질투와 공포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자신을 압도할 것을 두려워하며, 그 두려움에 의해 전쟁으로 내몰리게 된다. 반면 아테네는 이미 확보한 권력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권력을 추구하며, 이 과정에서 동맹국의 권리는 무시되고 약소국은 피해를 입게 된다. 이러한 투키디데스의 분석은 강대국 간의 패권을 둘러싼 파워게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며, 이는 현대 국제정치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시사점을 지닌다.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전쟁의 종결은 기원전 421년 체결된 30년 평화조약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조약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전투를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고, 동맹국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양측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서로의 영토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는 것이었다.

 

30년 평화조약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갈등은 여전히 심각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힘이 커짐에 따라 두려움을 느꼈고, 아테네는 스파르타가 자신들의 행동을 억제하려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결국, 이 갈등은 결국 30년 평화조약이 체결된 지 15년 후인 기원전 431년 스파르타의 왕이 아테네 인근 아티케로 군대를 파병하면서 폭발하게 되었고, 이로써 짧은 평화는 끝나고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스파르타의 왕 아르케다무스 2세에서 유래되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세력으로부터 폴리스를 해방하겠다는 명목으로 출격했으나, 아테네는 도시 방어에 집중하며 해전 중심의 전략을 취했다.

 

기원전 429년 아테네에서 페스트가 발생하면서 많은 시민이 사망했고,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동맹국 몇 곳을 탈취했다. 그러나 기원전 426년 새 지휘관의 강경한 공격으로 아테네는 반란을 진압하고 스파르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아테네는 필로스를 점거하고 요새를 세워 스파르타 탈주민을 보호함으로써 스파르타에게 경제적 타격을 입혔고, 스파르타는 아테네와의 화해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패권 경쟁과 내정 및 경제 상황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 은화가 기축통화로 자리잡으면서 경제 중심축이 페니키아에서 그리스로 이동하였고, 이로 인해 아테네가 상업의 중심이 되었다. 중세에 유대인들은 문자를 익히고 숫자에 밝아 환전상으로 부를 축적했으며, 이는 현대의 금융 구조의 모델이 되었다  아테네 은화에는 지혜의 여신 아테네의 상징인 부엉이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어두운 곳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지혜를 상징한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 그리스가 현대 문명의 원류로 여겨지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결국, 고대 유대인들은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지혜를 보여주었다.

 

동전 각인에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도안을 집어넣었다. 아테네식 주화와 도량형을 표준화하기 위한 통화법령을 반포하여, 거래비용을 최소화하고 교환을 용이하게 했다.  이러한 표시는 동전의 품질과 가치를 보증했고 위조로부터 동전을 보호했다. 고대사회에서 돈은 상업과 교역뿐 아니라 군인 급료로 쓰였으며 사회 전반의 교환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화폐 발명 덕분에 똑같은 기준에 의거해 모든 물건의 가치를 측정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후 동전에는 국가 권력을 상징하는 도안이 새겨졌으며, 돈은 상업과 군인 급여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교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화폐의 발명 덕분에 모든 물건의 가치를 동일한 기준으로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아테네가 스파르타보다 우월해진 이유에 관련해서는 기축통화의 중요성인데, 기축통화는 국제 거래에서 널리 사용되므로, 전쟁 중에도 자금을 쉽게 조달하고 유동성을 유지할 수 있다. 제적으로 신뢰받는 기축통화를 보유하면 전쟁 자금 조달 시 유리하며, 다른 국가와의 거래에서도 신뢰를 얻기 쉽다. 기축통화를 사용하면 교환비용이 줄어들고 여러 국가와의 무역이 원활해져 물자와 자원의 수급이 용이해진다. 기축통화를 보유한 국가는 필요한 자원을 해외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어 군사 작전의 성공에 기여한다. 기축통화를 통해 국제 금융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전쟁 비용을 지속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다. 기축통화를 보유한 국가는 동맹국과의 경제적 협력을 강화하여 군사적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아테네의 몰락의 원인

 

솔론의 개혁이 등장한 배경은 기원전 6세기 초 아테네의 어려운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이 시기 아테네 시민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귀족과 시민 간의 빈부격차는 심화되고 있었다. 더욱이 기원전 7세기에 제정된 ‘드라콘의 법’이라는 악법이 시민과 농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 법은 처벌이 지나치게 가혹하여, 사소한 잘못으로도 사형에 처해지거나, 빚을 지면 노예로 전락하는 등 공포의 법으로 악명을 떨쳤다.

 

귀족들은 좋은 토지를 소유하고 정치를 독점하며 파벌 싸움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반면, 가난한 농민들은 이들 귀족의 채무자로 전락해 빚을 갚지 못하면 농노가 되거나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에 처하게 되었다. 중간계급인 농민, 수공업자, 상인들은 정치에서 배제되어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테네는 유력자들과 시민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모험대차라는 형태의 금융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모험대차는 대출과 보험이 결합된 방식으로, 해양 상인들에게 자금을 대출해 주었다. 자금이 필요하지 않다면 무역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바다로 나가 무역을 하고 무사히 돌아오면 저이자로 대출금을 갚고, 만약 돌아오지 못할 경우 채무 관계가 사라지는 구조로 시장 활성화를 꾀했다.

 

하지만 아테네에서는 높은 이자율로 인해 환전업자와 고리대금업자가 등장했다. 그리스 전역의 금융업자들은 해상 무역뿐만 아니라 다양한 업종에서도 대출을 제공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아테네 시민들이 해상 무역과 금융업에 뛰어들게 되었고, 이는 황금 만능주의와 도덕적 해이를 초래했다. 돈을 다시 벌기 시작한 아테네 시민들은 더 이상 직접 전쟁에 나서려고 하지 않고, 대신 용병을 고용하게 되었다.

 

게다가 아테네는 전염병을 오랜 기간 겪으며 사회에 한탕주의와 허무주의가 만연했다. 니키아스 평화협정으로 전쟁은 일단 종료되었지만, 두 나라 간의 갈등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는 강경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 중 한 명이 바로 알키비아데스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어린 시절 부모를 일찍 여의었지만, 아테네의 명망가문에서 태어나 외삼촌이 페리클레스라는 점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져갔다.

 

알키비아데스는 점점 스파르타와 전쟁을 재개해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화협정이 존재해 이를 깨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아테네가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다른 폴리스를 동원해 스파르타를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다.

 

스파르타 옆에는 아르고스가 있었고, 두 도시국가는 서로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알키비아데스는 이 두 폴리스를 이간질하여 아르고스가 인근 폴리스들과 동맹을 맺고 스파르타를 공격하게 만들었다. 비록 이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지만, 아테네가 배후에 있었던 사실로 인해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대한 분노를 품게 되었다.

 

스파르타는 아르고스와의 전투로 인해 멜로스를 구원할 수 없었고, 결국 멜로스는 아테네와 끝까지 싸운 끝에 불바다로 변하고 말았다. BC 415년, 이듬해 시칠리아 섬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시칠리아는 이미 아테네에 의해 식민화된 지역으로, 대부분의 마을이 아테네의 간접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마을은 스파르타의 도리아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고,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시칠리아에서도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작은 소요사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결국 시칠리아 내 아테네 식민 마을에서 아테네에 지원병을 요청하게 되었고, 아테네 민회는 회의를 통해 원정을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강경파인 알키비아데스와 온건파의 수장인 니키아스를 함께 지휘관으로 보내기로 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지휘 아래 아테네 원정군이 시칠리아로 향하게 되었다. 이것은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상업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아테네는 식량 공급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불안정한 사회에서는 항상 금융이 탄생하기 마련했다. 그리스에서는 아테네, 비잔티움, 마르세유와 같은 항구 도시들이 상품의 집산지이자 금융과 교역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시칠리아로 떠난 아테네의 함대는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가 지휘했다. 하지만 온건파인 니키아스는 이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시칠리아 원정은 사실상 스파르타에 대한 선전포고와 같았다. 출발하기 전, 아테네 내부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대다수는 전쟁을 지지했지만, 알키비아데스를 반대하는 일부 세력, 특히 니키아스를 따르는 이들은 그의 영향력을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출항 직전, 아테네에서 헤르메스 신상이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그리스 사회에서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민회와 평의회는 범인을 찾기 위해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고, 일부 노예와 외국인들이 알키비아데스를 혐의자로 지목했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즉시 체포되었지만,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했습니다. 출항이 임박한 상황에서 그를 재판에 회부할지 여부에 대한 논의가 오갔습니다. 주전론이 대세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그의 혐의를 입증하고 처벌할 경우 군부 세력의 반발이 우려되었다.

 

 

아테네 멸망의 주역 알키비아데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의 스캄니다이 데모스 출신으로, 정치가 클레이니아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기원전 447년 카이로네아 전투에서 사망한 후, 외삼촌 페리클레스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는 아테네 명문가에서 풍족한 생활을 하며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청소년 시절에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동성연인이 되었다.

 

기원전 432년, 10대 후반의 나이로 소크라테스와 함께 포테이다이아 전투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우고 명예를 얻었다. 그는 부유하고 정치적 배경이 화려했으며, 뛰어난 외모와 재능, 용맹함, 웅변 능력으로 아테네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과 능력은 그에게 지나치게 큰 야망과 오만을 부추겨, 나이가 들면서 주변에 적이 많아지게 만들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신성모독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만약 그가 재판을 받게 된다면 아테네 본토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고, 이는 그가 원정 함대를 지휘할 수 없게 만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 분명했다.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그가 아테네에 남았다면 전례를 고려할 때 쉽게 처형당했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알키비아데스는 결국 아테네를 배신하고 스파르타로 망명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한편,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망명하여 아테네를 무너뜨릴 전략을 제공했다. 그는 시칠리아와 아테네를 동시에 공격하라고 제안하며, 니키아스가 싸울 의지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게 시칠리아로 지원병을 파견하라고 촉구했고, 이를 통해 아테네의 구원병 요청을 무력화하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아테네의 주요 자원인 라우리온 은광의 보급 루트를 차단할 수 있는 전략을 제시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의 가장 큰 적은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자가 아니라, 아테네의 친구들을 적으로 돌리도록 만드는 자라고 주장하며, 아테네의 식민지 반란을 자극하라고 권장했다.

 

스파르타는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에 따라 시칠리아에 원정군을 파견을 한다. 이에 아테네의 니키아스는 불안감을 느끼고 본국에 지원병을 요청했다. 아테네는 즉각 구원병을 보내기로 결정했고, 지휘관으로는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팍테리아 전투를 승리로 이끈 데모스테네스를 임명했다.

 

시칠리아에 도착한 데모스테네스는 강력한 공격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스파르타 연합군과 전면전을 벌였다. 초기에는 아테네 군이 승기를 잡는 듯 보였으나, 스파르타 군대가 빠르게 전열을 재정비하여 아테네 진영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아테네 대열은 흐트러지고, 서로 간의 혼란 속에서 아테네 군은 서로를 공격하게 되었다.

 

스파르타 병력의 맹공에 아테네 군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도망치던 중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많은 병사들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아테네의 시칠리아 주둔군은 더 이상 공격을 감행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데모스테네스는 귀환할 것을 제안했으나, 니키아스는 존버 전략을 고수하며 돌아가지 말자고 주장했다. 그는 패전의 책임을 두려워했고, 첩보망을 통해 스파르타 군도 군량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니키아스는 아테네 측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시칠리아에 계속 머물게 되었다.

 

스파르타는 알키비아데스의 지시에 따라 데켈리아를 점령하고 요새화하여 라우리온의 은광 보급선을 차단했다. 시칠리아에서는 스파르타 연합군이 아테네를 압박하고 있었고, 아테네는 군량미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니키아스는 여러 차례 철수작전을 시도했지만, 이미 늦어버린 상태였다. 스파르타와 시라쿠사 해군이 아테네 병력의 퇴로를 봉쇄한 결과, 철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는 육로를 통해 도망치려 하다가 스파르타와 시라쿠사의 기습을 받아 대부분의 군이 궤멸되었고, 두 지휘관은 포로가 되어 처형당했다. 이 패전으로 아테네는 5년치 예산을 잃게 되었다.

 

아테네를 책임졌던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가 사망한 뒤, 알키비아데스는 적국인 스파르타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아테네는 사실상 희망을 잃게 되었고, 알키비아데스의 스파르타 망명은 전쟁의 판세를 완전히 뒤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더해, 동쪽에서는 페르시아가 아테네의 식민 도시들을 하나씩 빼앗기 시작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이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스파르타에게 아테네의 식민 도시들에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페르시아는 스파르타를 지원하며, 그들의 해군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아테네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한 순간, 스파르타에서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 국왕의 여왕과 간통하다가 발각된 것이다. 스파르타 내부에서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고, 그의 행위는 그를 더욱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게 되었다. 결국 알키비아데스를 처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는 스파르타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알키비아데스는 페르시아로 망명하게 되었다.

 

델로스 동맹으로부터 전함을 지원받아 총 120척을 모은 아테네는 스파르타 해군을 무찌르고 코논을 구원했다. 이 전투가 아르기누사이 해전입니다. 결과적으로 노티움 해전과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아테네는 큰 피해를 입었다. 첫째, 노티움 해전에서 알키비아데스를 잃었고, 둘째, 아르기누사이 해전은 승리했지만 아테네에게는 실질적인 피해만 남겼다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아테네는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스파르타 해군이 도망치는 상황에서 아테네 해군에는 총사령관이 없었다. 이는 노티움 해전에서 여러 지휘관들이 처형당한 뒤, 책임을 지기 꺼리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각 함대는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하였고, 이로 인해 아테네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발목이 잡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스파르타 함대가 패배하고 도망치자, 일부 아테네 함대는 그들을 추격했습니다. 하지만 총지휘관이 없었던 탓에 일부 병력만이 추격에 나섰다. 추격 중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게 된 추격부대는 구출 요청을 할 상황에 처했지만, 제대로 된 지휘가 없어서 아무도 구출하러 가지 않았다. 결국, 일부가 구출을 시도했으나 폭풍우로 인해 다시 돌아오는 상황이 발생했고, 이들은 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의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물귀신이 되어버렸다.

 

이 사건은 아테네 민회와 500인 평의회에 의해 큰 논란이 되었고, 지휘관들은 폭풍우 때문이라고 변호했으나, 민중들은 아군을 구하러 가지 않은 것에 분노했습니다. 결국 지휘관들은 재판을 받게 되었고, 전원 사형에 처해졌다. 이로 인해 아테네는 더 이상 해군 지휘를 맡을 유능한 인재를 잃게 되었다.

 

스파르타는 리산드로스의 지휘 아래 재건에 성공하며 아테네의 식민 도시를 공격하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차단했습니다. 아테네는 소극적인 해군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식량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출정하게 되었다. BC 405년 아이고스포타모이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함대는 맞붙게 되었다. 아테네 지휘관들은 이전 지휘관들의 패배를 목격했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려 했다. 이때, 알키비아데스가 등장하여 아테네 해군에게 스파르타 군이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지 말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고 조언했으나, 그의 과거 배신으로 인해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진영을 떠났고,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전함 168척이 침몰하고 3000명이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이 포로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아테네의 유력 인사들은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이 패배는 아테네가 재기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으며, 동맹국들도 아테네에 등을 돌리고 스파르타에 공납하게 되었다.

 

아테네는 성벽에 의존하며 항전했으나, 스파르타의 육해군에 의해 포위당하게 되었다. 결국 BC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항복하게 되었고, 그 대가로 영원한 스파르타의 동맹국이 되며 해군을 양성할 수 없고 모든 식민 도시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이후 이오니아의 한 마을에서 고요하게 살다가 암살당하게 된다. 그의 죽음 뒤에는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진실은 여전히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다.

 

 

 

 

아테네의 패배 원인


알키비아데스의 배신과 스파르타 망명은 아테네의 군사 작전과 정치적 안정성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의 부재로 인해 아테네의 군사 작전은 조정이 어려워졌고, 내부의 의견 차이가 더욱 심화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아테네의 상업 활동이 위축되고 식량 공급이 중단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군사 작전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했다. 시칠리아 원정은 아테네의 자원을 소진시키고, 군사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많은 병력을 잃게 만들었다. 특히,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 간의 전략적 의견 차이가 작전의 일관성을 해치며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의 승리는 있었지만, 전투 후의 관리와 전략적 결정에서 실수가 발생했다. 특히, 패전 후 지휘관들이 처형되는 등 내부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결론적으로, 아테네의 패배는 내부 갈등, 전략적 실수, 경제적 어려움, 동맹의 변화, 사회적 불안 등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촉발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되어 아테네는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패배하고 힘을 잃게 되었다.

 

아테네는 기축통화와 솔론의 개혁을 통해 번영과 민주정치를 이루며 그리스의 맹주가 되었다. 그러나 패권과 팽창정책에 집착하면서 금화에 구리를 섞는 비윤리적인 통화주조로 재정적자를 초래하게 되었고, 이는 통화에 대한 신뢰 상실로 이어졌다. 결국 통화시장이 붕괴되면서 아테네의 수명도 끝나게 되었다.

 

 

 

 

 

 

 

 

 

 

전쟁에서 기축통화의 장점 요약

 

아테네의 은화 드라크마는 그리스 전역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기축통화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는 아테네가 무역과 경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였으며, 다른 도시국가들이 아테네의 화폐를 사용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유동성 확보 기축통화는 국제 거래에서 널리 사용되므로, 전쟁 중에도 자금을 쉽게 조달하고 유동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신뢰성 국제적으로 신뢰받는 기축통화를 보유하면 전쟁 자금 조달 시 유리하며, 다른 국가와의 거래에서도 신뢰를 얻기 쉽습니다. 무역의 용이성 기축통화를 사용하면 교환비용이 줄어들고 여러 국가와의 무역이 원활해져 물자와 자원의 수급이 용이해진다. 자원 조달 기축통화를 보유한 국가는 필요한 자원을 해외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어 군사 작전의 성공에 기여합니다. 경제적 지원 기축통화를 통해 국제 금융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전쟁 비용을 지속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동맹국과의 협력 강화 기축통화를 보유한 국가는 동맹국과의 경제적 협력을 강화하여 군사적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장점들은 전쟁 중 경제적 안정성과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2차 펠로폰네소스 전  결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와 아테나이 간의 패권을 두고 벌어진 전쟁으로, 아테나이가 더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스파르타는 이미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아테나이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군사력이 강화되면서 그리스 전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델로스동맹을 통해 사실상의 아테나이 제국을 형성한 아테나이는 스파르타와의 대결을 결행했으나, 전쟁은 예상과 달리 아테나이의 패배로 끝났다.

 

스파르타는 전쟁 이후 그리스의 최강국으로 떠올랐지만, 권력과 재력이 커지면서 내부적으로 부패하게 되었다. 절약과 절제가 특징이었던 스파르타 시민들은 부유함과 나태함에 빠져들었고, 이는 군사적 전략의 약화로 이어졌다. 출산율 저하로 시민 수가 줄어들면서 스파르타의 군대는 더 이상 예전의 강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스파르타는 레욱트라 전투에서 패배하고, 마케도니아라는 신흥 강국에 의해 점령당하게 된다. 따라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고대 그리스 사회의 패권을 넘어, 그리스의 최절정과 몰락을 연결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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