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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역사 9편 화폐의 발달 과정 일본 근대사3

by cellife 2024.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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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발달 과정 일본 근대사3

도요토미 시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금과 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권력을 획득하면서 나가사키 항을 직할령으로 편입하고, 주요 광산도 같은 방식으로 관리하였다. 이를 통해 화폐 주조권을 독점하고 통일된 화폐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하였다. 이 시기에 일본 전역에서는 새로운 금은 광산이 개발되거나 증산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에도 막부 서막  통화정책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1년에 금화와 은화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주조된 금화인 ‘게이초오반(慶長大判)’은 중량이 44.1돈으로, 품위는 1000분의 677로 설정되었다. ‘게이초코반(慶長小判)’도 주조되었으며, 중량은 4.76돈, 품위는 1000분의 843이었다. 또한, 1료의 4분의 1인 ‘이치부반(一分判)’도 주조되었고, 중량은 1.19돈으로 고반과 같은 품위를 유지했다. 오반은 10료, 고반은 1료로, 고반 10개와 이치부반 40개가 오반 1마이와 같은 액면 가치를 가졌다.

 

당시 금과 은의 대량 채굴로 인해 에도 막부는 금화폐의 표준화를 고반으로 정했다. 지배자가 품질을 보증한 금화를 ‘반킨(判金)’이라고 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만든 대형 반킨을 오반, 소형 반킨을 고반이라고 부른다. 고반과 이치부반은 형상, 품위, 중량의 통일성이 엄격하게 유지되었고 미츠츠구(光次)’라는 고쿠인(極印)을 찍어 표면 마모에 견딜 수 있도록 했다. 반면, 오반은 전통적으로 먹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고반과 이치부반이 실제 유통화폐로 활용된 반면, 오반은 증여 및 하사품으로 주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치부반의 발행은 화폐 경제가 본격화되었음을 나타내며, 에도 막부의 통화정책은 금과 은의 안정적 유통을 통해 경제 기반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긴자(金座)와 긴자(銀座)의 화폐 주조 역사

 

긴자(金座)는 에도 막부 시절 금화 주조를 담당한 기관으로, 막부가 제공한 금으로 금화를 주조하고 주조 금액의 1%를 수수료로 받았습니다. 조직은 고킨아라타메야쿠, 긴자닌야쿠쇼, 후키쇼로 구성되었고, 고토 가문이 세습 운영했으며, 1869년 조폐국에 통합되었다.

 

긴자(銀座)는 여러 상인이 공동 운영하며 은화를 주조했다. 은화는 품위는 정해졌으나 무게가 일정하지 않아 저울로 가치를 측정해야 했고, 주요 은화로 초긴과 마메이타긴이 있었다. 제니자는 에도와 오사카에서 전화 주조를 담당했으며, 대표적인 전화로 간에이쓰호가 있다. 금화, 은화, 전화는 에도 막부 주조소에서 생산되어 전국적으로 유통되었으며, 일본 최초의 체계적인 화폐 제도가 확립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1년부터 금화와 은화를 발행했다. 이 시기에 주조된 금화는 다음과 같다

 

다음 금과 은의 대량 채굴로 인해 에도 막부는 금화폐의 표준화를 고반으로 정했다.

  1. 게이초오반(慶長大判):
    • 중량: 44.1돈
    • 품위: 1000분의 677
  2. 게이초코반(慶長小判):
    • 중량: 4.76돈
    • 품위: 1000분의 843
  3. 이치부반(一分判):
    • 중량: 1.19돈
    • 품위: 게이초코반과 동일

오반은 10료, 고반은 1료, 고반 10개와 이치부반 40개가 오반 1마이와 같은 가치였다.

당시 금과 은의 대량 채굴로 인해 에도 막부는 고반을 금화의 표준으로 삼았다. 품질이 보증된 금화를 '반킨(判金)'이라 하며, 대형 반킨은 '오반', 소형 반킨은 '고반'이라고 했다. 고반과 이치부반은 엄격한 품질과 중량 기준을 유지하며, '미츠츠구(光次)'라는 고쿠인을 찍어 품질을 보장했다.

 

반면, 오반은 주로 증여나 하사품으로 사용되었다. 이치부반의 발행은 에도 시대의 화폐 경제가 본격화되었음을 나타낸다. 에도 막부의 통화 정책은 금과 은의 안정적 유통을 통해 경제 기반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의 화폐 개혁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경제적 불균형과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들이 포함되어 있다.

 

 

경제상황

 

각 번의 재정상태 악화는 에도막부의 재정 악화로 이어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에도막부는 화폐를 개주하여 품위를 낮추고 화폐 수량을 늘리려 했다. 첫 번째 시도는 1695년의 '겐록쿠의 개주'로, 이로 인해 겐로쿠오반의 품위는 521.1로 하락했다. 화폐의 재료와 무게는 변하지 않았지만, 품위가 낮은 화폐가 유통되기 시작했다. 1706년의 '호에의 개주'에서는 화폐의 무게도 가벼워졌다.

 

겐록쿠의 개주로 붕괴된 '게이초의 폐제'는 호에의 개주로 더욱 혼란해졌고, 계속된 개주로 화폐 가치가 하락하여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도막부는 막대한 개주 이익을 얻었으나,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금화와 은화의 품위 하락으로 인해 오래된 금화와 은화는 유통되지 않고 소장되었다. 이로 인해 금화와 은화의 가격비율이 붕괴되면서 은화의 가치가 급등하고, 금화의 가치가 하락하여 삼화 간의 균형이 무너졌다. 이러한 불균형으로 인해 특히 에도에서 생활하던 무사 계급이 큰 피해를 보았는데, 금화가 주로 사용되던 당시 금화의 가치 하락이 물가 급등과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들은 일본의 화폐 시스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경제적 안정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어려움을 겪었다.

 

 

간세이 개혁

 

도쿠가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에 의한 '교호 개혁'은 1716년부터 1745년까지 실시되었으며, 검약과 산업경제 진흥, 증세 정책에 중점을 두었다. 이어서 1787년부터 1793년까지 시행된 '간세이 개혁'은 상업 중심의 정책에서 농업 중심으로 전환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개혁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봉기에 대응하여 상업자본 억제와 농촌 및 도시의 부흥을 도모하며, 사상적 도덕적 해이를 단속하고자 하였다.

 

1714년,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금과 은화를 개주하여 품위를 게이초 수준으로 회복하였다. 이어서 1716년,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화폐제도를 개정하여 금화의 품위를 게이초 금화보다 높였다. 이러한 교호의 개주로 막부의 재정은 흑자로 전환되었지만, 농본주의 봉건체제에서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쌀 가격이 급격히 하락한 것이다. 쌀 가격은 매년 작황에 따라 변동하는데, 1732년에는 서일본 지역에서 메뚜기로 인한 흉작으로 대기근이 발생하며 기아자가 속출하고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1733년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되어 에도와 다른 지역에서 '우치코와시'라는 폭동이 발생했지만, 전반적으로 쌀 가격은 하향세를 보였다.

 

쌀 가격이 하락하자 막부는 물론 무사계급의 생활도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교호의 개주로 인해 은화와 전화의 가치가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쌀이 주로 거래되던 오사카에서 쌀은 비싼 은화로 교환되었고, 다시 전화로 교환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쌀에 의존하던 무사 계급은 점점 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막부는 쌀 가격을 올리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덴포 개혁

1841년부터 1843년까지 에도막부의 로쥬 미즈노 타다쿠니 중심으로 실시되었다. 이 개혁은 교호 및 간세이 개혁을 모델로 하여 강력한 정책을 시행하며, 무사와 관리의 기강을 바로잡고 경비 절약을 명령했다. 농민과 상인에게도 검약을 요구하고 사치를 금지하며, 향락업과 출판업의 단속을 강화했습니다. 물가 조사를 통해 안정시키려 했으나, 가부나카마 해산령을 발령하는 등 시장 통제에 실패하면서 오히려 혼란을 초래했다.

 

 

에도 막부 화폐경제 과정

 

이 세 가지 개혁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주된 원인은 에도막부가 화폐경제의 확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세 봉건사회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토지와 농작물로 연결된 관계였으나, 에도시대에는 상인들이 큰 재력을 얻어 무사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부채와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에도 막부의 경제정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권력 강화와 함께 금과 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통일된 화폐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1601년부터 발행된 금화와 은화는 일본의 화폐 경제를 본격화하며, 특히 고반을 금화의 표준으로 삼아 품질 보증을 통한 안정적인 유통을 목표로 했다. 에도 시대에는 여러 차례의 화폐 개혁이 있었으나, 교호, 간세이, 덴포 개혁 등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들 개혁의 실패는 에도막부가 변화하는 화폐 경제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상업 자본의 성장과 농민의 부담 증가로 인한 악순환이 심화되었다.

 

경제적 불균형과 인플레이션 문제는 에도막부의 재정 악화로 이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화폐 개주가 시행되었으나, 품위 하락과 가치 불균형을 초래했다. 이러한 상황은 특히 무사 계급에 큰 피해를 주었으며, 쌀 가격 하락과 함께 농민 봉기와 같은 사회적 불안 요소를 낳았다. 결론적으로, 에도 막부의 경제정책과 개혁 과정은 일본의 화폐 시스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경제적 안정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겪은 여러 어려움은 당시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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