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의 발달 과정 일본 근대사 초기
무로마치(室町) 시대부터 명나라의 화폐인 ‘영락통보(永樂通宝)’와 ‘홍무통보(洪武通宝)’가 일본에 수입되어 유통되는 과정에서 변화하였다. 중국 황제로부터 받은 하사품으로, 견명선(遣明船) 무역을 통해 일본에 들어왔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일본에서도 화폐 재료의 생산이 활발해지고, 화폐 주조 기술이 발전하여 중국전을 모방한 전화(貨)와 사전(私)이 제작되었다. 일본은 동을 중국에 수출하고 그 대가로 동전을 받는 형태로 무역을 진행했다.
중국전이 일본에서 사용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헤이안 시대 이후 일본인들은 중국전을 신뢰하고 있었으며, 둘째, 중국 정권의 권위가 높아 중국전이 아시아의 국제통화로 자리 잡았다. 당시 일본의 정치권력, 특히 아시카가 막부는 통일된 화폐를 발행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중국전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당시 중국의 화폐경제권 안에 있었던 것이다.
15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중국이 화폐 부족을 겪게 되자 일본에 대한 하사품으로 화폐를 공급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왜구의 발호로 인해 견명선도 중단되면서 일본에서 중국의 관전이 마모되고 열악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 사무역을 통해 중국 남부의 사주전 등을 유통하려 했다
.
이러한 마모된 화폐와 모조전은 ‘비타센’ 또는 ‘악전’으로 불리며, 거래 시 이러한 악전을 거부하거나 평가절하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러한 행위를 ‘에리제니(選)’라고 하였고, 화폐 유통의 경색을 우려한 다이묘와 아시카가 막부는 이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으나 효과는 없었다. 결국 센고쿠다이묘들은 비타센의 유통 현실을 인정하고 악전의 교환 비율을 정하려 했으나, 종류가 다양해 모든 악전에 대한 비율을 정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배경으로 도래전을 대체할 새로운 통일된 화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만든 ‘오반(大判)’을 시작으로,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주조된 금, 은, 동화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일본 경제가 중국 경제권으로부터 본격적인 자립을 이루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일본 근대 경제의 변화
초닌(町人) 계급의 등장으로 인해 에도시 대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초닌의 경제적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무사계층의 재정적 지위는 약화되었고 이에 더해 에도 시대 말기에 이르면 서구 열강에 대한 무사계층의 무능함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무사계층은 초닌계층과 농민계층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일삼게 되었고 이러한 사회적 위기 속에서 그동안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던 일부 하급 무사계층과 초닌계층이 결탁하여 에도막부를 전복하는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본 중세시대의 금융 체계는 헤이안 시대 말기 이후에 등장한 고리대금업의 발전으로 특징이다. 이 시기에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전문업자들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일반적으로 ‘가시아게(貸上)’라는 용어로 불렸다. 특히 사찰의 승려들이 주요 고리대금업자로 활동하였고, 이들은 사찰에 들어온 공물을 농민들에게 고리로 빌려주며, 갚지 못할 경우에는 그들의 전답을 몰수하기도 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도소(土倉)’라는 전당포가 등장하여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도소는 원래 전당물을 보관하는 창고를 뜻했으나, 점차적으로 고리대금업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도소라는 용어는 1155년에 처음 등장하였고, 남북조 시대에 확립되었습니다. 이들 도소는 상업 지역 전반에 퍼져 있었으며, 무로마치 시대의 교토에는 약 300~400개의 도소 업자가 존재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의류나 집기와 같은 동산이 주로 전당 잡히는 대상이었으며, 이자가 빌린 돈의 1배에 달하면 유질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부동산 관련 전당 잡기는 가마쿠라 막부가 영지를 중요한 재원으로 여겼기 때문에 고케닌(御家人)들이 영지를 매매하거나 전당 잡히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고케닌들 중 일부는 이 규제를 어기고 영지를 전당 잡히기도 했다.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막부는 재정적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도소에 세금을 부과하여 재원을 확보하려고 했다. 특히 무로마치 시대에는 막부가 도소로부터 과세를 징수하였고, 이로 인해 도소의 대부 이율이 상승하게 되었다.
높은 이자는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고, 이로 인해 변제 불능에 빠진 차용자들이 농민 봉기를 일으키거나 도소를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도소는 사찰이나 무사의 보호를 요청하거나, 약탈에 대비해 더 높은 이자를 요구하기도 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대부 이자가 100푼당 월 5푼, 연이율 6할에 달하기도 했다. 막부가 도소로부터 자금을 빌릴 때도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회수 불능 사태와 농민 봉기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결론적으로, 중세 일본의 금융 시스템은 고리대금업과 도소의 발달로 인해 복잡하고도 어려운 양상을 보였으며, 이는 경제적 불균형과 사회적 갈등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일본 화폐의 발전
일본의 전국 시대에는 각 지역의 제후들이 자신만의 화폐를 주조했지만, 이들은 대부분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유통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한 인물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그는 중앙집권적 통치를 통해 다양한 화폐를 주조하고, 제후들이 소유한 금광과 은광의 자원을 수납하여 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했다. 히데요시의 통치 아래 일본 전역에서 금과 은의 생산량이 증가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대량의 금화와 은화를 유통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399매의 금과 9만 3365매의 은을 수납하여 여러 종류의 화폐를 주조하였다. 특히, 1588년에 발행된 '덴쇼오반(天正大判)'은 약 165g의 무게를 지니며, 품위는 1000분의 740에서 700 사이로, 세계 최대의 금화로 알려져 있다. 비록 이 금화가 일반 통화로 사용되기보다는 증정 및 하사품으로 활용되었지만, 일본 전역의 화폐 통일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1596년경에 주조된 '엔포킨(圓金)'은 원형 금화로, 4푼이 1료로 통용되었으며, 이는 '이치부킨(一分金)'의 기초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군사용으로도 화폐를 주조했으며, 그 중 하나가 '분도킨(分銅金)'가 있다 은화의 경우, 1592년에 주조된 '고쿠요긴(御公用銀)'이 대표적이고 이는 조선에 출병할 때 하사용으로 주조된 최초의 공적인 은화로, 하카타에서 유통되며 '하카타 고쿠요긴(博多御公用銀)'으로도 알려졌다. 또한, 1587년에 주조된 '덴쇼츠호 금은전(天正通宝金銀)'과 1592년의 '분로쿠츠호 은전(文通宝銀)'도 주목할 만한 화폐이다. 히데요시가 주조한 화폐는 그 가치가 상당했다. 예를 들어, '덴쇼오반'은 1587년경 교토에서 현미 38석을 구매할 수 있었으며, 오늘날의 쌀 가격으로 환산하면 약 285만 엔에 해당된다.
결론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통일적 화폐 시스템 구축을 위해 다양한 화폐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이 화폐들은 주로 증정과 하사품으로 사용되었고, 일반적인 상거래에서의 유통은 제한적이었다. 일본의 근대적인 화폐 제도는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일본 근대 금융사의 특징과 핵심
일본 근대사의 초기 화폐 발달 과정은 정치적, 경제적 맥락 속에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치 아래에서 화폐의 통일과 발전은 일본 경제의 자립성을 높이고, 중앙집권적 통치의 기초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히데요시는 전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각 지역 제후들이 주조한 다양한 화폐들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중앙집권적 통치를 통해 금과 은의 생산을 증대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대량의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 체계를 확립했다. '덴쇼오반'과 같은 금화는 일본 전역에서 화폐 통일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는 경제적 안정성을 가져오는 데 기여했다.
히데요시가 주조한 화폐들은 군사용과 상업용으로 다양하게 활용되었지만, 그 사용 범위가 제한적이었던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일반 통화로서의 유통이 아닌 증정과 하사품으로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실제 상거래에서의 화폐 역할은 다소 미비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화폐 제도의 발전은 이후 에도 시대에 보다 발전된 근대적인 화폐 시스템으로 이어지는 기초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화폐 체제에 혁신을 가져오며 경제적 자립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는 단순히 화폐의 유통을 넘어서, 정치적 통합과 사회적 안정성을 위한 중요한 과정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현대 일본 경제의 기초를 형성한 요소들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