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근대사 말기 주요 특징
조선 말기(1860년대~20세기 초엽)는 근대화폐제도의 수용기로, 이 시기의 화폐 발전은 주로 악화된 당백전의 남발로 인해 조선왕조의 전근대적 명목화폐제도가 혼란을 겪기 시작한 대원군(대원군) 집권기와 연결된다. 대원군은 1860년대 초, 폐쇄적인 중앙집권적 봉건조선왕조가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집권하였다. 대원군은 세도정치로 인해 문란해진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고 강화하기 위해 서정개혁(庶政改革)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또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 쇄국정책과 군비 증강에 힘썼다. 이러한 조치는 조선의 근대화폐제도 수용과 더불어 국가의 경제 및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의 화폐 정책 변화는 조선의 경제 구조와 사회적 변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한반도 경제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악화 남발로 인해 발생한 명목화폐제도의 혼란은 봉건 국가 말기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문호를 개방하고 일본 및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관계를 맺게 되었다. 근대 화폐를 사용하는 여러 나라와의 통상 거래 과정에서 조선의 전근대적 명목화폐는 체제와 품질의 불일치, 불편한 운반, 그리고 격심한 가치 변동으로 인해 문제가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는 전통적 화폐인 상평통보를 계속해서 주조하고 유통시키는 한편, 체제와 품질이 통일되고 운반이 용이하며 가치가 안정된 근대 금·은 본위 화폐 제도를 도입하여 선진국과의 통상 거래에서 발생하는 장애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조선의 경제 체제를 현대화하고 국제거래에서의 경쟁력을 높이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한반도 근대사 말기 화폐정책의 이데올로기
대원군은 세도정치하에서 극도로 문란해진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재정비, 강화하기 위해 안으로 서정개혁(庶政改革)에 과감하였고 밖으로는 외침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보위하기 위하여 쇄국정책 내지 군비증강에 힘썼다. 대원군은 조선왕조가 당면한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비상적 재원확보책으로서 실질가치가 종래의 1문전(文錢) 동전의 5, 6배에 불과한 것에 액면가치만 100배로 고액화한 악화 당백전을 주조, 유통시키는 파격적 조처를 취했다.
악화 당백전을 6개월 동안에 1,600만 냥을 남발하여 종래의 1문전 상평통보와 병용함으로써 1670년대 말 이래 비교적 안정적으로 확대시행된 전근대적 명목화폐제도, 즉 동전을 법화로 사용하는 단일법화유통체계는 심각한 혼란에 이르렀다.당백전의 남발은 직접적으로는 전근대적 명목화폐제도가 문란해지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물가가 폭등하여 심각 사회경제적 모순과 폐단을 불러일으켰다. 모순과 폐단이 심각해지자 당백전을 사용한 지 2년여 만에 통용을 금지했다. 당백전의 통용을 금지시킴으로써 초래된 거액의 재정적 손실을 보전할 목적으로 역시 악화인 중국동전 300만∼400만 냥을 수입해서 사용하였다.
이렇게 악화남발로 야기된 명목화폐제도의 혼란현상은 봉건국가 말기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근대 화폐를 사용하는 여러 나라와의 통상 거래 과정에서 조선의 화폐는 체제와 품질이 통일되지 않고, 운반이 불편하며, 가치 변동이 심한 전근대적 명목화폐의 모순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조선왕조는 전통적 화폐인 상평통보를 계속 주조하고 유통시키면서, 체제와 품질이 통일되고 운반이 용이하며 가치가 안정된 근대 금·은 본위 화폐 제도를 도입하여 선진국과의 통상 거래에서 발생하는 장애와 경제적 손실을 극복하고자 하였다.이러한 근대 화폐 제도의 수용을 위한 정부의 화폐 정책은 개항을 전후하여 민족주의와 근대화 지향의식을 기반으로 적극 추진되었다. 1882년(고종 19)에는 금화와 은화의 통용이 결정되고, 은표(銀標)가 주조 및 유통되었다.
비록 이 은표가 근대 금·은 본위 화폐 제도 하의 은화에 비해 기술과 품질에서 부족했으나, 전근대적 칭량은화에서 근대 화폐로 발전하는 과도기적 형태로 볼 수 있다.
그 다음 해인 1883년에는 증가하는 재정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전근대적 명목화폐인 악화 당오전(當五錢)을 주조하고 유통시키는 동시에, 근대 금·은 본위 화폐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상설 조폐 기관인 전환국(典圜局)을 설치하고 독일로부터 근대 조폐 기술을 도입하였습니다. 1888년에는 역사상 최초로 15종류의 금·은·동전의 주조 및 유통이 시도되었다.
조선왕조의 근대 화폐 제도 수용 노력은 시험 단계에 그쳤다.
1891년에는 은 본위 화폐 제도를 채택하는 신식 화폐 조례(新式貨幣條例)가 공포되었고, 인천 전환국에서 은전, 백동전, 적동전, 황동전 등 5종의 근대 화폐가 주조되었다. 조선왕조는 문호 개방 이후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화폐 개혁 정책을 적극 추진하였으나, 소요 재정 조달의 어려움, 정파 간의 의견 대립, 화폐 주조 관리 및 조폐 기술의 미숙성, 청·일의 간섭 등이 원인이 되어 이러한 노력은 항상 시험 단계에 머물렀다.
한반도 근대사 말기 화폐정책의 이데올로기2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4년에 공포된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은 일본의 화폐제도를 본떠서 근대 은본위화폐제도를 최초로 실시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장정은 7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5냥 은화가 본위화폐로 설정되고, 백동전, 적동전, 황동전 등 4종의 화폐가 보조화폐로 사용되었다. 신식화폐가 다량 주조되기 전까지 국내 화폐와 동질, 동량, 동가의 외국 화폐를 병용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이 장정은 일본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서 추진되었으며, 일본 화폐의 국내 통용을 합법화함으로써 정부의 화폐 자주독립성을 침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본위은화는 극히 소량만 주조되고, 백동화가 남발되면서 화폐 가치는 하락하고 물가는 급등하는 백동화 인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했다. 또한, 일본과 러시아 간의 세력균형 변화로 인해 1901년에는 신식화폐발행장정의 시행이 중지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정부는 1901년 2월에 금본위제를 채택하는 ‘광무5년 화폐조례’를 공포했다. 이 조례는 전문 11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화폐의 제조발행권이 전적으로 정부에 속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20환 금화와 은전, 백동전, 적동전 등 7종의 화폐를 주조하고 유통할 것을 규정했다.
이 외에도 법화 규정, 구 화폐와의 교환 규칙, 사조 화폐의 통용 금지, 구 화폐 병용 규칙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 화폐조례는 1898년에 의정부회의에서 가결된 후, 1901년에 탁지부 대신의 제안으로 확정되어 공포되었다.
광무5년 화폐조례는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세력의 영향력 아래 친로정권 또는 친로배일정권의 주도 하에 제정되었다.이 조례는 금본위화폐제도의 도입을 통해 일본의 화폐권 침탈에 대응하고, 화폐권의 자주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1902년, 일본은 화폐조례에 대한 반발로 불법적으로 일본은행권의 국내 통용을 시도했다. 일본 다이이치은행은 한국 정부의 사전 허가 없이 자국 정부의 특허를 바탕으로 주식회사 다이이치은행권 규칙(株式會社第一銀行券規則)을 제정하고, 1902년 5월부터 한국 내에서 은행권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부산을 시작으로 목포, 인천, 서울 등으로 은행권 발행 지역이 확대되자, 정부 당국과 상인, 일반 대중은 은행권 통용 반대 운동을 벌였다. 일본의 화폐권 침탈 시도가 노골적이고 침략적이었던 만큼, 이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군함을 동원한 무력 시위로 이러한 저항을 강제로 진압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당시 한반도의 화폐권과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한반도 외세의 화폐정책 개입
한국 정부의 화폐권과 자주독립권에 대한 일본의 침해가 심화되면서, 일본은행권 통용 반대 운동은 국가의 화폐권을 지키기 위한 역사적 저항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1904년 2월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되어 전쟁으로 발전하였고, 전쟁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같은 해 8월에 체결된 <한일협정서(제1차 한일 협약)>에 따라 한국 정부는 일본인 메가타를 재정 고문으로 고용하게 된다. 메가타는 한국 정부의 재정 문제와 화폐 및 금융 업무를 전담하면서, 극도로 문란한 재정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백동화 남발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1904년 11월, 악화된 백동화 유통 질서를 정리하기 위해 전환국을 폐지하고, 조폐사무를 일본 대판조폐국에 위탁한다. 1905년 1월에는 금본위제를 채택하는 광무9년 화폐조례가 공포되었다.
이 조례는 1901년에 법률적으로 채택되었으나 실제로 시행되지 않았던 <광무5년 화폐조례>의 내용을 수정한 것이다.
광무9년 화폐조례에 따르면, “본국 화폐의 가격은 금을 기초로 하여 본위화의 근거를 공고히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로써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화폐제도로서 금본위제가 실시되었으며, 일본 다이이치은행이 이 화폐 정리 작업을 맡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금본위제의 채택은 국가의 자주독립권이 거의 상실된 상황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역사적 의미에는 한계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1901년에 공포된 광무5년 화폐조례가 법률상으로 금본위제를 도입했으나, 러일전쟁 등으로 인해 1904년 말까지 이 제도가 시행되지 못하고 은본위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은본위제도는 사실상 명목에 불과했으며, 1892년 5냥은화가 주조된 이후 1904년까지 추가 주조가 없었다. 한국의 명실상부한 금본위제도는 1905년 1월에 발표된 광무9년 화폐조례의 시행으로 확립되었으며, 이후 일본 다이이치은행이 발권은행으로 지정되어 새로운 화폐 주조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한국의 화폐제도와 자주독립권에 대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낸다.
한반도 외세의 화폐정책 결과
금화폐의 순금양목은 2분(分)을 가격의 단위로 정하고 이를 환(圜)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50전(錢)은 반환(半圜), 100전은 1환으로 칭해졌습니다. 화폐의 종류는 총 9종으로 구성되었으며, 20환, 10환, 5환의 금화폐, 반환, 20전, 10전의 은화폐, 5전의 백동화폐, 1전 및 반전의 청동화폐가 포함되었다.
제1차 한일협약을 계기로 일본 화폐의 국내 무한정 통용 규정이 1904년 정식으로 공인되었고, 일본 다이이치은행과 ‘화폐정리사무집행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여 이 은행이 발행하는 은행권을 법화로서 통용하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 7월부터는 경성, 평양, 인천, 진남포에 화폐 교환소를 설치하여 화폐제도 문란의 원인이었던 백동화를 회수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백동화의 회수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1908년 11월에 교환업무가 마감되었다.
엽전은 상품화폐의 일종으로 실질가치와 명목가치의 차이가 크지 않아 백동화처럼 심각한 폐해를 일으키지 않았다. 대중이 선호하는 점을 감안하여 조급한 정리를 피하고 국고의 출납을 통해 서서히 회수하도록 하였으므로 상당 기간 동안 준보조화폐로 계속 유통되었다. 금화는 1909년 한국은행 설립 때까지 145만 원이 주조되었으나, 거의 전부가 정화준비로서 보장되었다.
이러한 문란한 화폐 정리와 금본위제도 수립은 한국의 화폐, 금융 및 재정 정책을 일본의 의도에 따라 처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즉, 한국의 전통과 관습 등 여러 여건을 무시하고 일본의 침략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한국의 자주적 화폐제도 발전에 대한 진정한 정책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