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역사 50편 금융의 발달 과정 서양 중세사12
숫자 '0'(제로)의 발견은 세계 경제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바빌로니아에서는 기원전 3세기경 큰 수를 나타내기 위해 '0'을 사용했지만, 이는 수학적 양을 나타내는 개념이 아니었다. 인도학자들은 6, 7세기경 '0'을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정의
하였고, 이는 9세기에 이슬람 문화로 전파되어 아라비아 숫자가 확산되며 기업과 은행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1세기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유럽에 전파되면서 상업 활동이 급증했지만, 부기 오류가 문제로 남아 있었다. 이에 따라 복식부기가 등장하였고, 유럽의 복식부기는 14세기 초에 이탈리아에서 등장했다. 특히, 베니스와 제노바와 같은 상업 중심지에서 상인들이 거래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발전하였고, 이 시기에 복식부기 시스템이 정립되었다. 복식부기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상인 루카 파치올리(Luca Pacioli)로, 그의 저서 "산업 회계"에서 복식부기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제공했다. 이 책은 1494년에 출판되어 복식부기가 널리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자산과 부채를 명확히 구분하고 순자산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게 하여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했다. 복식부기는 신용할 만한 차입자를 찾는 데 도움을 주었고, 결과적으로 어음과 은행 등 새로운 금융제도의 발전을 이끌었다. 작은 숫자 '0'이 경제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중세에 지중해 연안에서 상업적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환전상이 등장하였고, 이들은 뱅크(bank)라 불리는 환전대에서 다양한 화폐를 교환해 상업적 불편을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 현대적 은행의 형태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나타났으며, 페루치가와 바르디가 같은 금융 가문이 예금을 받고 대출하는 금융중개인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금융중개업의 등장은 이자금지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유대인의 율법에서 시작된 이자금지는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도 적용되었으며, 상업의 발전과 함께 일반 신도에게도 확대되었다. 이 때문에 이자를 죄악시하는 인식이 강했으며, 이자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담보 대출이 등장하였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금융 거래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반복적이고 단기적인 금융거래에서는 담보 대출이 거래 비용을 증가시켜, 이를 줄이기 위해 신용거래가 발전했다. 상인들은 지속적인 거래를 통해 서로의 신용도를 평가하고 어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음은 일정 금액을 특정 시기에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담은 증서로, 처음에는 직접 지급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인들 간에 이전되고 할인시장에서 유통되었다.
이와 함께 예금은행업도 자연스럽게 발전하였다. 신뢰받는 무역상이 발행한 어음은 먼 지역에서도 지급수단으로 사용되었고, 작은 상인들은 자신들의 자금을 그 무역상에게 예치하게 되었다. 무역상은 이러한 예치금을 활용해 다른 어음을 할인하여 구매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하게 되었다.
푸거 금융 가문
야코프 푸거(Jakob Fugger, 1459~1525)는 중세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개인으로, 그의 재산은 현재 약 4,000억 달러로 추정다.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교황청과의 유착을 통해 사업을 확장하며, 금융, 상업, 광산을 장악했다. 푸거는 카를 5세를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세우는 데 기여하고, 아우크스부르크를 세계적인 상업도시로 발전시켰다. 그는 16세기에 유럽의 구리 생산을 독점하고, 광산에서 채굴한 구리를 리스본을 통해 인도로 수출하였다. 또한, 교황청과의 관계를 통해 면죄부 매매와 주화 주조에 관여하며 카톨릭을 지켰다. 푸거는 현대 자본주의의 선구자로, 상업 활동을 합법화하고 한자 동맹을 격파했다. 자선사업에도 힘썼으며, 아우크스부르크의 공공주택 건설에 기여했다.
어린 야코프를 당대에 가장 번창한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보냈다. 야코프는 베네치아에서 무역회사에서 도제로 일했다. 야코프는 베네치아에서 금융을 배웠다. 은행(Banco)이란 단어도 이탈리아에서 생겼고, 당시 베네치아는 지중해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야코프는 또 회계라는 것을 익혔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복식 부기를 개발했다. 회계란 개념이 없던 독일인에게는 놀라운 기법이었다. 장부에 대변과 차변을 만들어 양쪽이 맞아 떨어지는 회계는 야코프의 일생에 큰 도움을 주었다.
16세기 초, 교황이 프랑스와 영국의 추기경들에게 3t의 황금을 한 시간 안에 모을 수 있냐고 묻자, 그들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자 교황은 아우구스부르크의 한 시민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면박을 주었다. 이 시민은 바로 야콥 푸거로, 그는 16세기 유럽 경제를 좌우한 인물이다. 푸거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연결된 ‘황금실’로 불리며, 면죄부 판매 대금을 로마로 송금하는 역할을 했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 푸거가는 유럽 전역에 광범위한 지점망을 구축하고, 은과 동, 화폐, 직물 거래를 사실상 독점했다. 그의 막대한 자본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외교와 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상인, 여행자, 공공기관, 도시국가, 영주들 모두 푸거의 지점을 통해 금전 및 물자 거래를 했다. 푸거가는 1490년대에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지도권을 잡고, 천과 향신료 교역에서 벗어나 광산업과 금융업에 집중했다. 152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는 야콥 푸거가 광산업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언급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이 컸다. 푸거는 초기 자본주의의 대표적 기업가로, 유럽 경제의 중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야콥 푸거는 헝가리와 티롤 지방의 광산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 지역의 광산은 16세기까지 유럽과 전 세계에서 금과 은의 주요 생산지로서, 연간 100kg의 금과 10t의 은을 생산했다. 이곳은 전 세계 금 생산량의 33%와 유럽 은 생산량의 25%를 차지했다. 푸거는 이 광산의 독점을 통해 초기 유럽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그의 광산업 진출은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금융 연결을 통해 이루어졌다. 1487년, 푸거는 티롤 공작 지그문트에게 선금을 주고 계약을 맺은 후, 공작이 소유한 광산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취했다. 광산업은 당시 고수익 사업으로, 1487년부터 1494년 사이 푸거가는 약 40만 라인 골드굴덴의 수익을 올렸다. 푸거는 지그문트 사후, 합스부르크가 막시밀리안 1세와의 관계를 통해 티롤 지방의 은 교역에서 우선권을 획득했다. 그는 경쟁자인 한스 바움가르트너를 제치고 1491년부터 티롤 지방의 은 거래에서 주도권을 가졌다. 1522년 이전, 푸거가는 직접 광산을 소유하지 않았으나, 정치적 지원을 받아 중요한 광산권을 확보한 후 직접 광산업에 관여하게 되었다.
또한, 푸거가는 이탈리아 기술자 투르조 가문과 협력하여 동 원광석에서 동을 효율적으로 추출하는 기술을 개발, 수익성을 더욱 높였다. 이를 통해 푸거가는 은과 동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푸거의 업적과 금융의 발달 과정
푸거의 삶은 다사다난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군소 가문에 불과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성장을 목격하고, 가톨릭 교회의 대금업 금지 철폐와 면죄부 판매, 종교개혁의 여파 속에서 15~16세기 유럽의 경제적 변화에 깊이 관여했다. 그의 영향력 아래에서는 한자동맹의 붕괴, 복식부기의 전파, 경제 강국의 판도 변화, 그리고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갈등으로 인한 농민 전쟁이 일어났다.
푸거는 베네치아에서 배운 복식부기를 개량하여 알프스 이북에서 처음으로 적용한 인물로, 근대 회계 시스템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시장 정보를 갈망하며 정보망을 구축해 '푸거 뉴스레터'라는 세계 최초의 뉴스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를 위해 그는 통신원을 파견하여 시장, 정치 소식, 최신 풍문 등을 수집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삶이 항상 행복했을지는 의문이다. 사업상 동료를 제외하고는 친구가 거의 없었고, 유일한 자식은 사생아였다. 그의 제국을 물려받은 조카들은 그를 실망시켰고, 임종 시 아내는 그의 곁에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에 '어마어마한 부의 획득 면에서 으뜸이오'라고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문은 100년 이상 부를 누렸지만 결국 사라졌고, 그가 아
우크스부르크에 지은 공공주택 단지는 '푸거라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역사에서 푸거와 비견될 만한 부자로는 메디치 가문, 자무엘 호펜하이머, 프랜시스 베어링, 그리고 J P 모건 등이 있다. 특히 나탄 로트실트는 은행업으로 부를 쌓고 합스부르크 가문에 융자를 제공했지만, 복식부기를 도입하지 않아 더 큰 부를 쌓을 기회를 놓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푸거는 '자본주의라는 정신'을 창조한 인물로, 자유 기업과 규제 없는 자본 시장의 옹호자였다. 그는 돈이 기업가 정신을 고양시킨다는 것을 이해하고, 금융이 사람들을 의약품, 백신, 고층 건물 및 혁신적인 기술 개발로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사업 방식은 향후 500년 동안 자본주의의 기초를 다졌고,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며 정치인과의 관계를 활용하고, 법률과 회계의 도움을 받으며 정보를 수집해 활용했다.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 억만장자들이 따르는 부의 법칙을 그의 시대에 이미 발명한 것이었다. 이 책은 푸거를 '부 자체를 추구하며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최초의 현대적 사업가'로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