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역사 5편 화폐의 발달 의의
대체로 고려왕조와 조선 전기를 포괄하는 시기를 명목화폐제도의 도입 시도이니 한다면 조선 후기(17세기 초엽∼19세기 중엽)는 명목화폐제도의 확대시행기로 볼 수 있다. 화폐발달사상 조선 후기에 국가가 명목화폐인 동전을 법화로 채택, 유통시키기 위해 화폐정책을 적극 추진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화폐유통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전을 주조해야 했으나, 그 초기에는 조선 전기에 주조되었던 동전을 우선 유통시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국가가 화폐유통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보다 다량의 동전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화폐를 주조, 발행할 필요가 있었다.
한반도 근대사 후기 특징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국의 봉건사회는 여러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전통적인 관영 상공업체제는 와해되었고, 사영 수공업과 자유상업이 급속히 발전했다. 이 시기에 토지제도의 문란이 발생하면서 특권층의 토지 겸병과 상품화가 촉진되었고, 대토지 경영의 가능성이 높아지며 영리 중심의 상업적 농경이 보급이 되다.
봉건왕조의 관영 광업체제는 농민층의 부역노동 의존에서 벗어나 민간 자본이 광업 경영에 참여하는 민영화 방안이 시도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사회 신분 질서의 혼란으로 인해 전통적인 생업관이 변질되었으며, 농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보완하기 위한 상공업 진흥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이 시기 인구가 급증하면서 봉건사회의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이에 따른 새로운 생산 양식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대동법의 확대 시행은 상품경제와 교환경제의 발달을 촉진시켜 조세 체계를 단순하고 합리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는 봉건 사회의 상품 생산 및 유통 경제의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청나라 및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내 사회 생산력과 상품경제의 발전이 자극받았다. 화폐경제의 발달은 지식 계층의 화폐 유통에 대한 관심을 높였고, 청나라의 고증학 및 서양의 과학 문명은 윤리지향적 가치체계에서 실용성과 객관성을 중시하는 논리지향적 가치체계로의 전환을 촉진했다. 이러한 변화는 실학이라는 새로운 사회사조로 이어지며 학문적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국가의 화폐유통정책은 정유재란 병자호란과 같은 외침, 사회경제발전의 미숙성, 화폐원료의 공급난 및 화폐정책의 불합리한 운용 등이 직접적 간접적 원인이 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중단된 일이 있다.
근대 후기 화폐의 발전 과정
1650년대 말 중단되었던 화폐유통정책은 1678년(숙종 4)에 재개되었으며, 이때 주조된 상평통보(常平通寶)는 국가의 유일한 법화로 자리 잡았다. 상평통보는 중앙관서, 군영, 지방관청에서 필요에 따라 주조 및 발행되었다. 이 정책은 명목화폐를 법화로 전환하려는 중요한 시도로, 화폐유통 문제를 국가의 주요 과제로 삼았다. 정부가 주조한 화폐는 지속적으로 통용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민중의 불신을 해소하고 화폐정책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자 했다. 또한 동전을 통한 상품 거래와 국가 수입 지출의 화폐화를 통해 민중의 화폐 가치 인식을 심화시키려 했다. 물품화폐인 추포의 유통을 금지하고 칭량은화의 사용을 억제하여 동전의 유통 영역을 확대하는 방법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화폐유통정책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 외침과 사회경제 발전의 미숙성, 화폐 원료 공급난, 불합리한 화폐 정책 운용 등으로 인해 여러 차례 중단된 바 있다. 이러한 장애 요인은 당시 사회가 명목화폐의 통용을 필요로 하면서도 근대적 발전을 저해하는 역사의 흐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1690년대 말에는 물품화폐와 칭량은화의 유통이 지배적인 봉건사회에서 명목화폐인 동전이 국가의 유일한 법화로서의 유통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동전이 초기 유통 보급 단계를 넘어 일반적인 가치 척도, 교환 수단, 지불 수단 및 가치 저장 수단 등 다양한 화폐 기능을 발휘하게 되면서, 호조와 각 지방관청의 비축과 수입·지출의 화폐화 비율이 증가했다. 소작료와 노임의 화폐화가 증진되었으며, 상업자본과 고리대자본이 더욱 유통성향이 큰 화폐자본으로 전환되었다. 동전은 토지, 노비, 가옥, 가축 등에서부터 시장의 일용잡화에 이르기까지 거래의 매개체로 사용되었다.
1720년대 이후에는 회령, 의주, 동래, 제주도 등지에서도 동전이 통용되면서 유통 영역이 국내 각 지방으로 확대되고, 각 계층의 화폐 가치 인식이 심화되었다. 1730년대부터는 상평통보만을 법화로 사용하는 단순화폐유통체제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고, 고액전의 주조와 금화, 은화의 병용 주장이 제기되었다. 1810년대에는 정약용이 근대 금·은본위제와 유사한 화폐제도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1860년대에는 악화인 당백전의 남발로 화폐제도와 유통질서의 혼란이 있었지만, 조선왕조의 전근대 화폐제도, 즉 단순한 단일법화유통체제를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왕조는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부터 동전을 법화로 유통시키기 위한 화폐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670년대 말부터는 쌀이나 베 같은 물품화폐와 칭량은화의 유통이 지배적이던 사회에서 명목화폐인 동전이 널리 유통됨으로써 봉건사회의 중세적 생산양식과 가치체계의 해체가 촉진되었다.
화폐 유통은 국내외 상업 발달과 화폐자본화한 상업자본의 성장을 촉진하였고, 상업자본의 산업자본으로의 전환 가능성을 높였다. 화폐경제의 활성화로 동을 비롯한 화폐 원료의 수요량이 급증하여 조선 후기에는 화폐 원료 공급을 위해 각 지방의 동광이 개발되었다. 이러한 동광 개발에서는 근대 자본주의의 초기 징후가 나타났다. 화폐경제가 활성화되면서 화폐의 절대 수요량이 급증하였고, 대규모 화폐 주조법이 빈번히 시행되어야만 했다. 이 모든 과정은 한반도 경제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며, 화폐 정책의 발전과 그 사회적 영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근대 후기 화폐의 발전 결과
화폐주조법은 공장제 수공업체제로 운영되었으며, 주조기술과 공정의 분업화에 있어 금속 수공업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화폐 자본의 성장이 가속화되었고, 이러한 자본이 농촌 사회에 침투하면서 농민의 몰락과 농촌 사회의 분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농경 사회의 분화는 상업 자본의 침투와 화폐 경제의 확산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으며, 지방 관리의 농민 착취가 가속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임노동자가 창출되었고, 특수 계층에 의해 광점된 대토지는 농업 기업화의 기초가 되었으며, 상업적 농경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중앙정부와 지방 관청의 수입과 지출, 소작료 및 노임의 화폐화 비율이 증가하면서 일반 민중의 일상생활에서도 거래가 화폐를 매개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국가 경제의 관리와 일반 화폐 제도가 확산되었고, 일반 민중의 소비 성향과 투기 심리가 조장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절약과 검소를 미덕으로 여겼던 전통적 경제 윤리의 변질을 초래했다.일부 양반층은 축재와 수익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농민들은 토지를 떠나 상업에 종사하거나 상업적 농경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로 인해 경제 의식이 실질화되고 이윤 추구가 합리화되었다. 봉건 조선 사회의 성리학적 가정 윤리는 급격히 변질되었으며, 화폐 경제가 가족 경제에 침투함에 따라 가족 구성원들은 이기적 타산에 더욱 민감해지고 공동체 의식은 약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성리학적 가정 윤리에 기반한 가부장적 대가족 제도가 와해되는 현상이 촉진되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현대 경제 시스템의 기초가 되었으며 화폐 경제의 발전은 사회 구조와 가족 관계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