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금융의 역사 49편 화폐의 발달 과정 서양 중세사11

by cellife 2024. 8. 15.
반응형

 

중상주의의 유대사 - 서양 중세사11

 

그는 유대인이 고대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무역상으로 성장했고, 농업 사회에서 상품 교환과 대부업 같은 부차적 경제 활동에 종사한 점을 설명했다. 이러한 활동은 지배적 생산양식에 비해 주변적이었지만, 사회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고 강조하였다.  그들이 무역상으로서 명성을 얻은 이유가 유대 문화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조건 덕분에 이 지역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무역에 종사하게 되었고, 이는 고대 세계의 물질적 환경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가 지역 상업 계급의 성장을 초래하고, 그 결과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심화되었다고 설명한다. 신흥 계급은 유대인들이 과거에 수행하던 경제적 기능을 대체하며, 이로 인해 유대인 학살과 추방이 시작되었다. 스페인,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여러 국가에서 유대인들은 대규모로 추방당하게 되었다. 봉건제의 쇠퇴와 함께 유대인의 경제적 중요성도 사라졌지만, 봉건제의 영향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여전히 부유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유대교의 관점에서 볼 때, 서구 기독교의 역사는 어둡고 모순된 범죄로 얼룩져 있다. 기독교 교회는 유대인들을 고리대금업자로 왜곡하여 자신의 범죄를 희석화하려 했으나, 이는 진실을 감추려는 위선적인 시도에 불과다. 유대인들이 특정 직업에 종사하도록 강요받은 책임은 기독교 교회에 있었으며, 이들은 박해를 사주하거나 묵인하여 국민들의 부채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악한 수단을 사용했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중세 유대인들은 기독교도로부터 격리되고 추방되면서 게토 제도가 시작되었다.

 

1290년 영국에서는 유대인을 공식적으로 추방하였고, 프랑스와 독일 등 서유럽에서도 유대인들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다. 14세기에 발생한 흑사병은 유대인이 서유럽에서 몰아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15세기 말에는 이슬람 세계에서 기독교 세계로 회복된 이베리아반도에서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추방되는 상황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렇게 추방된 유대인들은 북아프리카와 동유럽의 폴란드, 그리고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등지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스페인 등 지중해 지역의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주로 북아프리카와 오스만제국 이스탄불로 이주하였고, 독일과 프랑스 북부의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은 폴란드로 이동하게 되었다.

 

1348년에서 1350년 사이의 흑사병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더욱 심각한 상황을 초래했다. 일부 기독교도들은 이 병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렸고, 이는 대규모 테러와 학살로 이어졌다. 결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지에서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졌다. 기독교화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유대인들은 더 이상 이슬람 지배하의 관용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강제 개종과 세례를 강요받았다. 이러한 박해는 1492년 스페인 추방령으로 절정에 이르렀고, 포르투갈에서도 유대인들은 강제로 국외로 추방당했다. 이로 인해 많은 세파르딤 유대인들이 네덜란드와 독일로 이주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미 공식적으로 설정된 게토에서 생활해야 했다. 서부와 중부 유럽에서 유대인들을 격리한 것은 중세 봉건 체제가 해체되면서 발생한 경제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상업과 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자유도시에서는 유대인들이 필요한 존재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활동을 제한할 필요도 있었다.

 

 

르네상스 베니스의 상인

이탈리아어로 '베네치아'라고 불리는 베니스는 ‘물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석호 위에 떠 있는 여러 섬들이 연결되어 있어 수로가 주요 교통로로 기능하고 있다. 베니스는 십자군 원정으로 동방 무역이 확장되면서 14세기에서 15세기 초에 해상 무역 공화국으로서의 영광을 누렸다. 이 도시는 생선과 소금 외에는 생산품이 없었지만, 조선업과 해운업을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활발한 무역은 상업 혁명을 일으키고, 모직물, 가죽, 유리 제품을 생산하는 공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가장 인상적인 등장인물은 샤일록이다. 그는 유대인이라는 출신과 고리대금업이라는 직업으로 주목받다. 당시 유럽에서 유대인은 예수를 죽인 이교도로 천대받아, 교회의 허가 아래에서 가장 천한 직업인 대금업에 종사하였다. 유럽에서 유대인이 주도하던 대금업은 르네상스와 대항해 시대를 거치며 변화했다. 무역의 발전은 자금 중개를 기본으로 하는 금융업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금융업은 국가의 비호를 받는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금융업은 예금 자산의 수백 배까지 대출을 해주며 수익을 올리는 '땅 짚고 헤엄치기'가 가능해졌다. 많은 금융가들은 권력자와 황제에게 돈을 빌려주며 그들의 보호 아래에서 성장했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금융시장을 혼란에 빠뜨려 이익을 추구하고, 전쟁 자금을 대기도 했다. 유대계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세계적인 금융 재벌로 성장했다.

 

 

해상보험

 

한 장소에서 생산되지 않은 물건을 다른 장소에서 구해오는 교역은 인류가 정착 생활을 시작한 고대부터 이어져 온 중요한 활동 했다. 과거에는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물품을 운반하는 데 짧게는 수일, 길게는 몇 달이 걸렸고, 이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몇몇 용감한 상인들이 주도했던 상행위에는 항상 사고의 위험이 따랐다. 이러한 위험은 단순한 마차 바퀴의 파손부터 산적이나 짐승의 습격과 같은 심각한 상황까지 다양했다. 특히 해상교역에서는 위험도가 더욱 높았다. 많은 인원을 동원하고 철저한 준비를 통해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는 육상 사고와는 달리, 해상에서의 사고는 치명적일 수 있었다. 당시 측량과 항법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 바다에서 길을 잃는 일이 잦았고, 습한 해양 기후는 식량 보존을 어렵게 만들어 선상에서 아사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예측할 수 없는 바다의 날씨는 배의 전복이나 난파, 표류를 초래했으며, 폭풍이나 역풍으로 인해 일정이 지연되는 일도 흔했다. 과거의 해상교역은 완전한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육상 운송보다 빠르고 저렴하게 대량의 물품을 수송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상인들과 도시 주민들은 해상교역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해상교역의 위험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고, 교역을 수행하는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도 마련했다. 교역 상인은 도시의 필수품을 공급하는 중요한 존재였다. 특히 여러 차례 해상교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경험이 풍부한 상인이 한 번의 폭풍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된다면, 이는 그 개인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손해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상보험 제도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제도는 기본적으로 위험을 분담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대 중국에서는 여러 상인들이 각자의 선박에 화물을 균등하게 나누어 실어 사고 발생 시 손해를 최소화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 배가 사고를 당하더라도 다른 배들이 무사하면 전체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상인에게는 위험 부담 없는 교역을, 금융가에게는 높은 수익을 보장한 모험대차는 고대 그리스 이래로 유럽에서 해상교역의 위험을 보장하는 주요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중세에 들어서면서 상인 길드의 발전으로 초기 보험 형태가 형성되었으나, 모험대차는 여전히 주류를 차지했다. 그러나 1230년대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이자 수취를 금지하는 이자금지령을 내리면서 기존의 모험대차는 사용될 수 없게 되었다. 상인들은 해상교역의 위험 보장을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유사 해상보험이 등장했다. 소비대차는 기존 모험대차의 변형으로, 금융가가 상인에게 빌려주는 명목으로 허위 계약서를 작성하고, 항해가 성공하면 계약을 무효화하며, 실패할 경우 가상의 대출금을 상환하여 손실을 보상하는 방식이다.

가장매매계약

금융가가 상인의 선박과 화물을 매입하는 형태로, 항해가 성공하면 계약을 취소하고, 실패하면 계약 금액을 지급했다. 이러한 변화는 이자금지령과 함께 13세기 이후 상업 발전으로 상인들이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된 영향을 받았다. 결국 상인들은 금융가의 도움 없이도 독립적으로 교역을 준비하게 되었고, 손해만을 보상받는 형태로 변화했다. 이러한 점에서 안토니오의 모습은 과장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모험대차는 이자 대신 수수료 형태로 금융가의 이익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자본력을 가진 금융가는 대출 없이도 이자와 원금을 받지 않음으로써 이자금지령의 제약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모험대차가 해상보험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상인들은 일정한 수수료를 납부하고 상행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금융가가 손실을 보상하는 구조를 통해 더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변형된 모험대차는 현재 해상보험의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소비대차와 가장매매계약은 현대의 보험계약에 해당됐다. 이자금지령이 시행된 이후 100년 동안 금융가와 상인들은 새로운 제도를 신속히 정착시켰고, 이 제도들이 해상보험으로 전환되는 데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14세기 중반까지 이탈리아에서 전문적인 보험 계약이 체결되었으며,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해상보험 계약은 1383년 피사와 1395년 베니스에서 체결된 것이다.

 

스페인은 해상보험의 발달이 이탈리아와 함께 시작된 나라 중 하나로, 14세기부터 해상보험 계약이 관찰되었다. 특히 1435년에 제정된 바르셀로나 법은 세계 최초로 보험계약에 대한 규정을 성문화한 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14세기부터 지중해 해상에서의 지배력을 갖추었으며, 활발한 해상무역을 통해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발원지가 되었고, 스페인은 신대륙을 포함한 해상 대제국을 형성했다.

 

해상 활동의 증가와 해상보험 제도의 발전은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스페인 여왕의 후원을 받았다. 또한, 모험대차가 최초로 자리 잡은 곳은 해양 도시국가인 아테네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발전한 해상보험이 17~18세기 영국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영국은 17세기를 거치며 세계 해상권을 장악하고, 다음 세기에는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부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르네상스의 금융 결론

금융업은 자본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효율과 이윤을 추구하며 산업과 경제 발전의 강력한 동력이 되었지만, ‘고삐’가 풀린 금융업은 위험할 수 있다. 금융의 또 다른 면은 탐욕이기 때문이다. 전성기를 누리던 베니스의 귀족과 상인들의 금고에 쌓인 돈은 금융과 부동산으로 몰렸고, 이어 과시 소비와 예술, 건축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베니스는 서서히 침몰하게 되었다. 경제 활동과 자금 중개라는 본래의 임무를 잊고 ‘돈 놓고 돈 먹기’에 집중하는 금융은 결국 불안정한 기반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