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의 상황 - 서양 중세사10
성전기사단은 군사적 임무가 1차적이었지만, 실제로 전투를 수행하는 기사는 적고, 대부분의 구성원은 재정 관리나 지원 업무를 담당했다. 기사와 수도사들은 개인적으로 청빈을 맹세했지만, 기사단은 기부받은 재산을 관리해야 했다. 귀족들은 자신의 부재 중에 재산 관리를 성전기사단에 부탁하며 이들에 대한 신뢰가 높았다.
성전기사단의 부는 관리 수수료와 기부받은 재산의 이익 증가로 확대되었고, 신용장(증명서) 발행을 통해 추가 수익을 얻었다.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은 도적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성전기사단에 귀중품이나 돈을 맡기고 신용장을 발급받았다. 이 신용장은 유럽 전역에 분포한 1천여 개의 지부를 통해 사용되었으며, 순례자들은 목적지에서 이를 현지 화폐로 교환해 사용할 수 있었다.
성전기사단은 중동에서 얻은 광대한 농장에서 곡식과 과일을 생산하고, 이를 유럽과 중동 간의 해상 교역을 통해 이익을 남겼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해군력을 유지하며 지중해의 해상 안전에도 기여했다. 또한, 성전기사단은 키프로스를 소유하기도 했으며,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계략으로 해체될 때까지 유럽 전역에 영향력을 미쳤고, 중세 유럽의 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
중세 서유럽에서 농노들은 영주를 위해 하루의 70%를 노동해야 했고, 남은 시간에야 비로소 자신의 땅을 가꾸는 삶을 살고 있었다. 영주들은 막대한 권력을 쥐고 있었고, 농노들은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도망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장원을 떠나기 시작한 최초의 도망자는 농부가 아닌 수공업자들이었다. 이들은 땅에 의존하지 않고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쉽게 장원을 탈출할 수 있었다. 도망자들이 찾은 곳은 왕이나 영주, 사원의 장원이었지만, 그곳은 원료를 구하기 쉽고 안정적인 거래처가 있는 지역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서유럽의 최초 도시들이 형성되었다. 그 도시들 중에는 쾰른, 마인츠, 스트라스부르,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 에르푸르트 등이 있었다.
이 도시에서는 정교한 분업 체계가 구축되어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고, 수공업자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키울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상품 경제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도시가 번영하면서 영주들도 이 새로운 세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도시로 유입되는 자본은 곧 힘으로 작용했고, 시민들은 영주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대신, 자신들의 도시를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11세기 후반, 서유럽에서는 도시가 급속히 발전하며 '상업 혁명'의 시대가 열렸다. 도시 주민들은 더 이상 봉건 체제의 속박을 받지 않는 자유민이 되었고, 그로 인해 돈을 벌기 위한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상품과 화폐의 거래는 신흥 귀족을 형성하였고, 이는 봉건 제도의 기반을 흔드는 계기가 되었다.
'시민'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정체성이 등장하게 된 것은, 이들의 생활 방식이 시장 중심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부를 축적하는 데 집중하였고, 그들의 성공은 '자유'에 의존하고 있었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함으로써 진정한 부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중세 물가
이 자료는 식품, 교육, 중세 건축, 의복, 갑옷, 무기에 대한 가격 및 가치 정보를 정리한 표 (요약)
- 수도원 및 대학
- 수도원의 학부: 연간 2L.
- 옥스포드: 기숙사비 연간 104s, 강습료 26s 8d.
- 대학: 상류층 학생은 연간 4L에서 10L.
- 기타 비용
- 검술 강습: 매달 10s.
- 책 비용: 7권에 대략 5L, 대여료는 pecia당 0.5d에서 1d.
식품 가격
- 치즈 및 맥주
- 치즈: 가격은 다양하며, 고급 치즈는 3s 4d에 판매됨.
- 에일: 최고급 에일은 갤런당 0.75d에서 1.25d.
- 맥주: 고급 맥주는 쿼트당 1d.
- 암소: 6s에서 10s.
- 양: 1s 5d.
- 돼지: 2s에서 3s.
- 가금류: 닭 2마리 1d, 달걀 2다스 1d.육류
건축
- 연간 대여료: 런던의 술집 대여료는 연간 200L, 시골집은 5s, 장인의 집은 20s 등 다양함.
- 건축 비용: 나무로 지은 문루는 5L 6s 8d, 석제 문루는 30L. 성채의 성벽에 세우는 탑은 333L 이상.
- 자재비: 랑제의 타워 건축에 사용된 석회암, 목재, 몰탈 등의 자재비와 인건비가 기재되어 있음.
의복
- 상류층 의복: 유행하는 겉옷은 10L 이상, 신발 4d, 부츠 6d.
- 소작농 의복: 리넨 슈미즈 8d, 털옷 3s, 튜닉 1d-6d.
- 의복 제작 비용: 소작농의 튜닉 제작에 필요한 옷감은 야드당 8d-1s 3d.
갑옷
- 갑옷 가격: 메일(체인메일)은 100s, 기성품 밀란세 갑옷은 8L 6s 8d.
- 기타 갑옷: 스콰이어의 갑옷 5L-6L, 검증된 갑옷 14L 2s 8d.
- 갑옷 관리 비용: 체인메일 청소 비용은 9d.
무기
- 무기 가격: 싸구려 칼은 6d, 휠락 권총 한 쌍은 2L 16s.
- 부수적인 도구: 권총용 홀스터는 6d.
이 자료는 중세 시대의 생활비와 물가 수준을 이해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제도 이해
10세기 전후, 서유럽은 영국과 프랑스의 권력 중심과 분산 사이에서 현대 서양 문명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국왕에게 세금을 내는 도시들에 도시 자치권을 부여하는 특허장을 발급함으로써, 영주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는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큰 영지를 소유하고 있던 영국의 플랜태저넷 왕실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더욱이 프랑스 왕의 영지는 영국 왕의 영지에 둘러싸여 '프랑스 섬'이라 불릴 정도로 상황이 어려웠다. 그동안 프랑스 왕은 자금과 병력, 식량, 세력이 부족해 영국 왕에게 제대로 대항조차 하지 못하고 치욕적인 시간을 보내야 했다. 반면, 영국은 왕위 쟁탈전을 거쳐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정복왕 윌리엄 1세가 등장했으나,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달라졌다.
12세기 들어 영국의 대외 무역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양모와 농산품을 대량으로 수출하고 은을 수입하게 되었다. 이는 무역수지 흑자를 통해 많은 외환을 확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상주의적 접근은 국가의 부를 화폐의 보유량이 아닌 소비량으로 평가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부의 집중과 불균형을 초래했다. 그 결과, 1180년에서 1220년 사이 영국 역사상 최초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도시들이 크게 발전하며 수공업에서 영국을 초월하게 되었다. 1202년, 필리프 2세는 영국의 존 왕에게 브르타뉴 공을 살해한 사건에 대해 파리 궁정 법정에 출석할 것을 명령하였고, 존 왕이 이를 무시하자 노르망디 항구를 점령하고 그의 영지를 몰수했다. 1214년, 존 왕은 프랑스를 공격했지만 크게 패배하였고, 이로 인해 영국의 유럽 대륙 영지는 전부 몰수되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존 왕은 세금을 대폭 인상했으며, 이는 귀족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215년 봄, 귀족들은 런던에 모여 국왕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고, 결국 존 왕에게 마그나 카르타를 서약하도록 강요하였다.
마그나 카르타는 영국 교회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왕권을 제약하며 사유재산권을 법률로 명문화한 중요한 문서로 자리 잡았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영국과의 전쟁을 통해 왕권이 더욱 강화되었고, 루이 9세(1226~1270) 통치 시기에는 왕권이 영주의 상법권과 군사권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삼부회(États généraux)는 프랑스에서 성직자, 귀족, 일반 시민(평민)으로 구성된 대표 회의로, 왕이 필요할 때 소집하여 국가의 주요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삼부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 구성: 성직자, 귀족, 그리고 일반 시민으로 나뉘며, 각 부문은 독립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투표를 하였다.
- 권한: 삼부회는 세금 부과나 전쟁과 같은 중요한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왕의 권한이 강해짐에 따라 그 권한은 점차 제한되었다.
- 역사적 맥락: 삼부회는 중세 말기부터 근대 초기에 걸쳐 여러 차례 소집되었으며, 특히 1789년 프랑스 혁명 전, 왕권에 대한 반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삼부회는 프랑스의 정치적 변화를 나타내는 중요한 기구로, 나중에 프랑스혁명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프랑스 국왕은 성직자, 귀족, 시민이 참여하는 '삼부회'를 소집하여 각자의 이익을 대변하게 하였고, 이는 중앙집권 체제로의 전환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발생한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은 이러한 중앙집권적 꿈을 좌절시켰다. 마그나 카르타와 삼부회는 오늘날 서양 문명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이정표로, 중세의 암흑시대에서 근대 문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횃불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중세 유럽의 제도 이해2
11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자치 공동체 운동은 12세기에 네덜란드로 확산되며 도시 주민들이 치안판사에게 복종하고 평화와 자유를 지키기로 맹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중세 도시의 부활을 이끌어내었고, 자치 길드 연합이 형성되었다. 길드는 상인과 직인들이 상호 지원을 목적으로 결성한 단체로, 서유럽의 도시에서 정기로 장시가 열리면서 무역이 재개되었다. 특히, 이탈리아의 베니스와 제노아는 지중해를 통해 서구와 비잔티움, 이슬람 국가 간의 연결 고리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십자군 원정은 이슬람 세계와의 교역을 촉진시켰고, 13세기에는 팍스 몽골리카가 비단길을 통해 중국과 서아시아 간의 교역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빌렘 반 루이즈브룩, 마르코 폴로, 오도리크 다 포르데논 및 이븐 바투다와 같은 선교사와 상인들은 13세기 중반 이후에도 중요한 여행을 계속하며 이 무역로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동아시아에서 수입되는 향료와 인도에서의 물품은 바닷길을 통해 페르시아 만과 홍해에 도달했고, 이후 육로를 통해 레반트의 도시와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유럽의 상업 도시들인 파리, 볼로냐, 살레르노, 옥스퍼드에서는 대학이 설립되었고, 이곳에서 그리스와 아랍의 학문이 기독교 전통과 융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 철학은 기독교적 맥락에서 재해석되었고, 이는 스콜라 철학으로 발전하여 법학, 신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13세기의 유명한 학자들, 즉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 로저 베이컨, 둔스 스코투스는 모두 프란체스코 교단과 도미니크 교단의 일원으로, 그들은 청빈한 삶을 실천하며 이단과의 싸움에 헌신함으로써 대학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회, 문화, 종교 제도의 발전은 유럽의 팽창에 중요한 자극이 되었으며, 이는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새로운 경제적 동기, 즉 산림과 농경지의 개간과 같은 요인과 연결된다. 또한, 이슬람 지배 하의 스페인 재정복, 튜턴 기사단의 프러시아 및 리보니아 정복, 리투아니아의 개종(1386년 이후) 등은 변방 지역을 종교적, 정치적으로 유럽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시기에 해상 교역이 활성화되고, 새로운 무역로가 개척되며, 자본주의의 기초가 다져졌다. 이러한 변화는 농업 생산성 향상과 제품의 다양화, 상업적 기구의 발전을 촉진하였고, 결과적으로 도시의 성장과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상업혁명은 또한 금융 시스템의 발전을 가져오며, 상인 계층의 부를 축적하게 만들었고, 이는 유럽 사회 전반의 경제적 활력을 불어넣는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상업혁명은 중세 유럽의 경제를 활성화하고 근대 경제 체제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에 상업혁명으로 나타나는 중세 유럽의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