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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역사 47편 화폐의 발달 과정 서양 중세사9

by cellife 2024.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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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 기사단  서양 중세사9

 

템플 기사단(Templar Order)은 1119년에 설립된 중세의 군사 수도회로, 공식적인 명칭은 '솔로몬의 성전 기사단'이다. 이 단체는 성지 예루살렘에서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성전에서의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템플 기사단은 제2차 십자군 전쟁 동안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유럽 전역으로 그 영향력을 확장하게 된다.

 

  1. 설립 배경: 템플 기사단은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성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생겨났다. 성지에 가는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안전을 위해 군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 조직 구조: 기사단은 엄격한 규율과 계급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기사, 사제, 그리고 하급 기사 등으로 나뉘며, 각 계급에 따라 역할과 책임이 달라졌다.
  3. 재산과 경제적 힘: 템플 기사단은 전투 외에도 금융 활동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그들은 유럽 전역에 성과 성채를 건설하고, 땅과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단체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4. 종교적 신념: 템플 기사단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군사적, 종교적 활동을 했다. 그들은 성전에서의 신앙을 수호하고, 이를 위해 전투에 참여했다.

 

템플 기사단의 금융 구조 

 

템플 기사단은 중세 시대의 군사적이고 종교적인 조직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템플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주로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성전에서의 전투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군사 활동에 그치지 않고, 금융 조직으로서도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그들의 역사는 세계 금융의 가장 드라마틱한 면모를 보여준다. 1119년, 신앙심 깊은 아홉 명의 기사가 모여 템플 기사단을 결성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가난, 고행, 신앙심, 복종을 맹세했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많은 재물을 얻었고, 이로 인해 참회자이자 약탈자로서 두 가지 성과를 거두었다.

 

템플 기사단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금융 조직을 운영했다

 

  1. 은행업무: 템플 기사단은 중세 유럽에서 최초의 은행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다. 그들은 자산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성지로 가는 순례자들에게 돈을 빌려주며, 이자 수익을 올렸다. 특히, 순례자들은 자신의 자산을 템플 기사단에 맡기고, 그 증명서를 통해 다른 지역에서도 자금을 인출할 수 있었다.
  2. 국제적 네트워크: 기사단은 유럽 전역에 걸쳐 지부를 두고 있었고, 이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국제적 네트워크 덕분에 그들은 다양한 지역에서 금융 거래를 쉽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는 상인들과의 거래에도 큰 도움이 되었고, 안정적인 거래 환경을 제공했다.
  3. 재산 소유 및 관리: 템플 기사단은 광범위한 토지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농업, 상업, 부동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익을 창출하였고, 이러한 자산은 기사단의 재정적 기반이 되었다.
  4. 전쟁 자금 조달: 템플 기사단은 성전과 같은 전쟁에서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군사 작전의 자금을 지원하고, 전투에서의 비용을 관리했다.
  5. 신뢰와 명성: 템플 기사단은 그들의 명성과 신뢰 덕분에 많은 이들에게 자산을 맡기고 금융 거래를 진행하는 데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엄격한 규율과 윤리를 바탕으로 운영되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았다.

결국, 템플 기사단은 군사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금융 조직으로서도 중세 유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들의 금융 시스템은 후에 발전하는 현대 은행 시스템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템플 기사단은 동방 원정을 위한 자금 조달을 위해 교황과 왕실로부터 자금을 빌려주었고, 새로운 십자군에게 대출을 제공했다. 그들은 십자군이 주둔하는 지역마다 분점을 두어, 유럽과 중동 지역에 약 1,000여 개의 지점을 운영하게 되었다. 이러한 체계는 지역적, 업종적, 국가적 경계를 초월한 국제적인 금융 조직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

템플 기사단은 환전에서 좋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깨달았다. 신십자군은 다양한 나라에 있는 템플 기사단의 분점에서 증명서 하나만으로도 쉽게 현금을 교환할 수 있었고, 일반 상인들도 이들의 송금 시스템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유재산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만약 돈을 모으게 되면 죽은 뒤 템플 기사단의 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이러한 신앙에 기반한 규칙은 금융 활동의 위험 부담을 줄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템플 기사단의 단규에는 하느님을 대하듯 주군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서약이 추가되었으며, 이는 오늘날 스위스 은행의 고객 외에는 누구도 돈을 인출할 수 없는 규칙과 유사한다.

 

이러한 규칙들은 템플 기사단에 명성과 신뢰를 가져다주었다. 13세기 후반에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조직으로 성장하였으며, 금융업이 단순한 저축에서 송금 및 신탁 관리로 확대되면서 전통적인 은행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결국, 템플 기사단은 군사적 역할을 넘어서 금융의 세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템플 기사단 정치와 금융 

 

템플기사단은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그들은 성지를 참배하기 위해 오는 신자들에게서도 이익을 챙겼으며, 셀주크튀르크의 반격으로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후에는 전투 대신 금융업에 집중하게 되었다. 교황과 왕실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아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십자군에 대출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기사들은 방패와 갑옷, 무기, 말 등을 개인 비용으로 마련해야 했기에, 자금이 필요했다. 십자군 원정이 여러 차례 진행되는 동안 템플기사단의 금융 사업은 급속히 성장했다. 그들은 유럽과 중동 전역에 1,100곳 이상의 분점을 두었고, 원정에 참여한 기사들은 템플기사단의 분점에서 단 한 장의 증명서로 쉽게 현금을 인출할 수 있었다. 이내 일반 상인들까지도 기사단의 송금 체계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와 영국의 귀족들 역시 기사단에 거액을 대출받았다.

 

템플기사단의 성공 뒤에는 '예금자의 허락 없이는 누구에게도 돈을 인출하지 않는다'는 명확한 원칙이 있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적에게 붙잡혔을 때, 그의 신하들은 왕의 예탁금을 환급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템플기사단은 이를 거절했다. 저자들은 이러한 원칙이 오늘날 스위스 은행의 고객 외에는 누구도 돈을 인출할 수 없게 하는 규칙의 기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번창하던 템플기사단은 1307년 10월 18일, 프랑스왕 필리프 4세의 갑작스러운 체포령으로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필리프 4세는 우상숭배와 동성애 등의 이유로 138명의 기사를 체포하고, 그들이 소유한 자산을 압류했다. 이는 금융업계에서 예고 없이 찾아오는 재난을 의미하는 '검은 금요일'이라는 표현의 기원이 되었다.

 

필리프 4세는 전쟁으로 자금이 급했던 상황에서 템플기사단의 막대한 자산을 노렸으나, 그가 얻은 돈은 기사단 자산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자산은 단장의 조카가 숨겨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기사단의 보물창고를 찾으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각종 대중매체에서도 템플기사단의 유산을 다루고 있다.

 

왕실의 가난과 영주의 부유함이 공존한 중세의 아이러니, 국가 기간산업을 육성하지 못해 몰락한 스페인의 역사, 재정 파탄으로 촉발된 프랑스혁명, 제1차 세계대전을 둘러싼 영국과 독일의 금융전쟁 등 다양한 경제적 이야기를 흥미롭게 전달하고 있다.

 

템플기사단의 몰락 

1285년, 필리프 4세가 프랑스의 왕위에 오르자, 1304년부터 왕실 재정이 적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그는 자금을 확보할 방법을 모색했고, 그 결과 템플기사단의 재산을 갈취하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는 각 지방의 관리들에게 비밀 서신을 보내고, 1307년 10월 13일 이 서신을 공개하였다.

 

서신에는 템플 기사들을 우상숭배, 이단행위, 동성애 등의 죄목으로 체포하라는 지시가 담겨 있었다. 모든 템플 기사를 체포하고 그들의 동산과 부동산을 압류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날, 프랑스 전역에서 템플기사단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작전이 시작되었고, 파리에서만 138명의 기사가 체포되었다. 이 날은 금요일로, 금융업계에서 '검은 금요일'이라는 표현이 생겨난 기원이 되었다. 검은 금요일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재난을 의미한다.

 

템플기사단의 단장 자크 드 몰레는 화형에 처해지기 직전, 조카 기스드 몰레 백작을 비밀리에 만나 자신의 직위를 물려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는 필리프 4세가 갈취한 보물은 극히 일부일 뿐, 진정한 보물은 전임 단장의 무덤에 숨겨져 있다고 전했다. 조카는 템플기사단을 재건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상심하여, 임종 전 보물을 프랑스의 한 성으로 옮겨 숨겼다고 전해진다. 그 성에는 템플기사단이 사용하는 비밀 부호가 새겨져 있어, 특정 시간에만 드러나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템플기사단의 보물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추측이나 전설에 불과하지만, 필리프 4세가 극도로 가혹한 통치자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는 템플기사단을 탄압하고, 당시 프랑스에 거주하던 부유한 유대인들을 박해하여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국외로 추방했다. 이러한 행동은 필리프 4세가 100년 전쟁 중 전쟁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템플기사단 몰락의 원인

왜 통치자는 백성을 착취하는 굶주린 늑대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은, 부를 창출하는 것보다 착취나 약탈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만약 국왕의 폭주를 견제할 세력이 없어진다면, 국민은 자연스럽게 통치자의 착취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권력은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고, 공평과 도덕은 사라지며 경제 성장도 정체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경로 의존성'이라고 부르며, 경쟁이나 규제가 없는 상황에서 국왕의 권력만이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게 됐다. 결국, 무차별적인 약탈과 착취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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