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 서양 중세사8
당시 중세 유럽의 국가들은 국력이 성장하면서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고, 영주들 사이에서는 잦은 내전이 발생하고 있었다. 로마 교회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군사력을 이슬람 군대와의 전투로 전환시키기로 결정했다.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는 이들에게는 면벌부(indulgence)가 주어졌고, 전사자에게는 순교의 영광이, 생존자에게는 물질적 보상이 약속되었다. 많은 기사들은 종교적 동기 외에도 모험심과 영토 확장을 위한 욕망을 가지고 십자군에 참여하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세 가지 주요 요인
스페인에서의 이슬람 세력에 대한 '성전'의 발전이며, 1063년, 아라곤 왕 라미로 1세의 복수를 위해 교황 알렉산더 2세가 군대를 소집하면서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었다. 교황은 전투 참여자들에게 국가 의무 면제를 약속하며, 이 운동은 교황령 확대와 정치·경제적 동기를 유발했다. 800년경부터 시작된 프랑크족의 전통다. 카롤링거 국왕들은 예루살렘 성지와 순례자 보호의 권리를 주장했으며, 10세기부터 순례자 수가 급증하자 클뤼니 수도원에서 이들을 위한 보호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무장한 순례자들이 대규모로 결합하게 되었고, 이는 십자군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11~12세기 인구 증가와 토지 부족 문제다. 이는 시토 수도원이 국경 지역에서 토지를 개척하려는 시도와 연결되며, 십자군 전쟁은 식민지 확보를 위한 전쟁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하여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11세기 후반, 셀주크 튀르크족은 소아시아, 팔레스타인, 시리아를 정복하며 예루살렘의 성지 순례자들을 괴롭히고 통행세를 부과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Alexius Comnenus, 1056-1118)는 교황에게 군대 파견과 성지 회복을 요청했다. 비잔틴 제국은 형제 국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서방 교회는 실질적으로 그들의 형제가 되어 주지 못했다. 교회의 관점에서 성지가 이교도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과 성지 순례가 방해받는 것은 그들의 권위에 큰 타격을 주었다.
교회는 1096년부터 175년 동안 총 8차례의 십자군 전쟁을 치렀다.
제1차 십자군 전쟁(1096-1099)은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주도로 소집되었으며, 이때 최초로 면벌부가 제공되었다. 십자군은 1099년에 예루살렘을 탈환하였고, 고드프리(Godfrey)가 예루살렘의 왕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형제 볼드(Baldwin)이 뒤를 이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해안선에 안디옥, 트리볼리, 예루살렘 등의 라틴 국가들이 수립되었다.
제2차 십자군 전쟁(1147-1149)은 1144년에 무슬림에 의해 에데사(Edesa)가 함락되면서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St Bernardus)의 설교로 촉발되었다.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독일 황제 콘라드 3세가 참전했으나, 2만 5천의 군대가 시리아에 도착했을 때에는 5천 명으로 줄어들어 결국 귀국해야 했다.
제3차 십자군 전쟁(1189-1192)은 1187년에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바바로사, 영국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립 2세가 참여하였으나, 많은 토지를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탈환에는 실패했다.
제4차 십자군 전쟁(1202-1204)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독려로 시작되었지만, 십자군은 예루살렘 대신 비잔틴 제국을 침략했다. 그들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배를 이용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습격하고 라틴 제국을 세우게 되었으며(1204-1261), 비잔틴 왕조는 니케아로 망명하게 되었다.
제5차 십자군 전쟁(1217-1221)에서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군대가 예루살렘 왕과 안디옥 왕자의 군대와 힘을 합쳐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1219년 이집트의 다미에타에서 큰 패배를 당하고, 1221년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이집트 군대에 다시 대패하여 항복하고 8년의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제6차 십자군 전쟁(1228–1229)에는 황제 프레드리히 2세가 참여하였다. 그는 십자군에 참전하겠다고 서원했으나, 교황 그레고리 9세와의 갈등으로 1228년에 파문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술탄과 외교를 통해 회교의 모스크가 있는 지역을 양도받는 대신, 예루살렘, 나사렛, 베들레헴을 10년 동안 확보하는 협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1244년에는 무슬림이 예루살렘을 다시 정복하게 된다.
제7차 십자군 전쟁(1248–1254)과 제8차 십자군 전쟁(1270)은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지도 아래 진행되었다. 제7차 전쟁에서는 이집트를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하게 되었고, 루이 9세와 그의 군대는 포로로 잡히게 된다. 제8차 전쟁에서는 루이 9세가 튀니지에서 두 달을 보내다 사망하였다. 십자군 전쟁은 첫 번째 전투에서만 승리를 거두었고, 나머지 전투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실패원인
이러한 실패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교황은 군사력을 통합할 지휘권이 없었고, 왕들과 기사들 사이의 종교적 열정은 존재했지만 탐욕과 이권 욕망이 강해 단합할 수 없었다. 둘째, 십자군들은 지리적 이해 부족으로 인해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었다. 셋째, 그들의 약탈과 잔인한 행동은 원주민들의 반감을 샀다.
십자군들은 이교도들을 생존권이 없는 존재로 간주하고, 하나님을 위해 도살해야 할 적으로 여겼다. 이러한 태도는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복수를 정당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십자군들은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대량 학살을 감행하였다.
십자군 전쟁 이후 경제적 효과
12세기 이후 십자군의 인기는 급격히 감소했다. 인구 증가가 둔화되면서, 프랑스조차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고, 독일에서는 튜튼족 기사들이 프로이센과 폴란드로 활동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1310년 이후 유럽 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했고, 14세기 중반에는 노동력 부족이 심각해졌다.
또한, 십자군 전쟁 초기 10년 동안 약 10만 명이 성지로 갔으나 자녀를 거의 낳지 않았고, 남자들의 높은 사망률로 인해 동방에 정착한 프랑크족 이주민들은 한두 세대 후에 사라졌다. 이후의 이주 물결에서도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식민지 국가로 이주하여 적극적으로 개발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었으나, 교회가 이민자를 지원하지 않으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윤리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유럽 사회에 큰 변화를 촉진하였다. 이 전쟁을 통해 유럽 국가들은 단결하였고, 이슬람의 유럽 침략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십자군들은 비잔틴 문화의 화려함과 이슬람 문명의 우수성을 목격함으로써 문화적 인식을 확장하게 되었다.
더불어, 십자군 전쟁은 지중해 무역과 동서 간의 문명 교류의 길을 열어주었고, 이는 유럽에서 도시의 성장을 가져왔다. 이러한 문명 교류는 학문의 발전과 대학 설립을 촉진하여, 결국 르네상스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십자군 운동은 지중해를 다시 유럽인의 활동 무대로 변화시켰다. 비잔티움-소아시아 항로와 베네치아, 제노바, 마르세유 등을 통해 십자군과 함께 다양한 군수 물자가 대량으로 운송되었고, 이로 인해 지중해는 유럽인의 교역로로 다시 부활했다. 이러한 지중해 무역은 당시 등장하기 시작한 유럽 내륙 시장들과 결합하여 유럽에 새로운 상업적 활력을 불어넣었고, 궁극적으로 유럽을 초기 상업 자본주의 사회로 이끌었다. 십자군들은 귀금속과 동방 물산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며, 동방 물산에 대한 서유럽인의 관심은 결국 2~3백 년 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탐험으로 이어졌다.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 모험 또한 동방 물산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상업의 부활은 토지에 기반한 봉건 세력을 서서히 몰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기사와 영주들이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면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고, 이는 봉건 체제의 붕괴를 촉진했다. 반면, 봉건 세력의 몰락은 군주들에게 왕권을 강화할 기회를 제공하였고, 군주들은 상공 시민과 제휴하여 봉건 귀족을 억압하며 통치권을 강화해 나갔다. 이러한 변화는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결국 17세기의 절대주의로 이어지는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동·서방교회의 분열과 비잔틴의 멸망
이슬람 세력의 확장으로 인해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무슬림에게 넘어갔지만, 서방의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의 비잔틴 교회는 오랜 기간 교제를 유지했다. 서유럽은 9세기 동안 무슬림을 스페인에서 몰아내고, 10~11세기에는 북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선교하여 그 영향력을 확장했다. 비잔틴 교회 또한 루마니아, 불가리아, 러시아 등 슬라브 지역에 정교회를 전파했다. 그러나 1054년, 동·서방 교회는 서로를 파문하며 결국 분열하게 된다. 이 분열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정치적인 이유다. 서방 교회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교황이 보편 교회의 수위권을 주장한 반면, 동방 교회는 모든 주교의 권위가 동등하다고 보았다. 둘째, 신학적인 이유로, 로마가톨릭교회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필리오케”(and Son)를 추가하여 성령의 발현에 대한 해석을 달리한 것이었다. 동방 교회는 이를 이단으로 간주하며 반발했다. 셋째, 문화적인 이유로, 서방 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하고, 동방 교회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면서 신학적 용어에 대한 오해가 생겼다. 마지막으로, 전통의 차이로 인해 사제의 결혼 문제와 성만찬의 방식이 달랐다.
하지만 동·서방 교회 사이의 신뢰가 결정적으로 상실된 사건은 1204년의 십자군이 비잔틴 제국을 침략하고 라틴 제국을 세운 것이었다. 이 사건 이후 동·서방 교회 간의 관계 회복 노력은 있었으나, 서방 세계에 대한 비잔틴 국민들의 불신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비잔틴 제국은 1453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간에 큰 상처를 남겼다. 제1차 십자군은 동방교회의 손님으로 가서 그곳에 라틴교구를 설치하였고, 제4차 십자군은 1204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여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렸다. 비록 57년 후 그리스인들이 국가를 재건했지만, 쇠약해진 비잔틴 제국은 1453년에 셀주크 튀르크족에게 멸망하였다. 십자군 전쟁은 오늘날까지 기독교인과 무슬림 간의 증오를 부추기는 요소가 되고 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한 이 전쟁은 기독교의 도덕적 기준을 타락시키며,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십자가 깃발 아래에서 일어난 이 거룩한 전쟁은 사실상 인간의 탐욕을 드러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