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제국 - 서양 중세사7
아랍 전사들은 대정복 운동 시기에 단봉낙타를 활용하여 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은 낙타를 타고 사막에서 적에게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전술로 적을 혼란에 빠뜨렸다. 유목민들은 사막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으며, 사막은 그들에게 바다와 같은 존재였다. 무함마드 시대에는 이 국고의 대부분이 빈민에게 분배되었다. 이러한 공평한 분배 정책은 기득권 세력들이 자신의 몫을 포기하고 이슬람이 빠르게 확장된 이유 중 하나였다. 이슬람 문화는 무슬림 군대가 지나간 곳마다 전파되었다.
이슬람 세력은 마스트 전투에서 655년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지중해 동부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해군이 없던 이슬람 군대는 콥트 기독교도 선원들의 도움을 받아 승리를 거두었고, 이로 인해 유럽과 인도를 연결하던 해로가 차단되었다. 이슬람 상인들이 지중해와 인도양에서 상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7세기에서 9세기까지 인도양은 안전하고 자원이 풍부한 해역으로 번성했다.
압바스 왕조가 수도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기면서 해상 무역이 더욱 활성화되었고, 페르시아어가 남쪽 바다의 공통어로 자리 잡았다. 대정복 운동 기간 동안 약 130만 명의 아랍인이 아라비아반도를 떠나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이란으로 이주하며 농경사회의 지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에 이슬람력이 널리 퍼지고, 코란이 편찬되며 이슬람 사회의 기반이 확립되었다.
대정복 운동이 마무리되면서 상업적 확장이 중요해졌고, 중앙아시아의 부유한 문명이 서유럽보다 매력적으로 여겨졌다. 이슬람 군대는 751년,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유라시아 서부의 주요 무역로를 점령하였으며, 이 상황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슬람 역사와 경제
고대 문명의 후각은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으며, 고대인들은 후각이 민감해 도시의 장소를 냄새로 식별할 수 있었다. 특히, 유향과 몰약은 그들에게 최고의 사치품으로 여겨졌다. 아라비아반도의 무덥고 건조한 기후 속에서도, 예멘 지역은 연평균 강수량이 250ml로 '행복한 아라비아'라 불리며 유향과 몰약의 주요 생산지로 알다. 기원전 1500년부터 아라비아 상인들은 낙타를 이용해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지역에 유향과 몰약을 판매하였고, 이집트와 바빌론의 귀족들도 향료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향료의 수입이 국가 재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 제국의 수도에서는 매년 막대한 비용이 향료 구매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고대 문명에서 향료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잘 보여다.
유향과 몰약은 수천 년간 인기 있는 상품으로, 아라비아반도의 상인들은 이를 통해 큰 부를 축적했다. 이 향료 무역은 이슬람의 탄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610년, 메카의 상인 무함마드는 이슬람교를 창시하며, 이후 아라비아반도의 유목민들을 통합하고 정복 전쟁을 통해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빠르게 점령했다. 이슬람 제국은 7세기와 8세기 동안 대정복 운동을 통해 예전의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차지하며 세계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무함마드는 카라반 상인으로 시작해 유향과 몰약의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다. 아랍인들은 단결하여 대정복 운동을 전개하고, 이집트와 리비아 등지를 이슬람 세계로 편입시키며 기독교와 이슬람의 분열을 초래했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아랍 민족의 부상과 이슬람 제국의 형성을 이끌어냈고, 이는 이후 세계사의 중요한 분기점을 형성하게 된다.
이슬람 무역
초기 이슬람 정복자들은 팍스로마나를 재현하여 더욱 확대된 팍스 이슬라미카를 창출했다. 팍스 이슬라미카는 팍스로마나보다 강력하게 유라시아 전역에 영향을 미쳤으며, 심지어 신라까지 그 영향권에 포함되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팍스로마나에 대해서만 배우지만, 이슬람의 우마이야와 압바스 제국은 옛 국경과 장벽을 없앤 거대한 자유무역지대 역할을 했다.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이루어진 자유무역은 고대부터 동서 교역의 경계 역할을 하였고, 홍해와 페르시아만, 육상 실크로드는 경쟁을 멈추고 통합된 글로벌 물류 시스템을 형성했다. 칼리프의 종주권을 인정받는 세력은 누구나 이러한 길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무함마드 사후 100년이 지난 8세기 중반, 페르시아 출신으로 추정되는 무슬림 상인 수천 명이 당나라의 항구와 내륙 도시로 진출했다. 이슬람 원양상선의 크기에 놀란 당나라 사람들은 이를 '페르시아의 거대 상선'이라고 불렀다. 845년에 이븐 쿠르다드비가 편찬한 왕국과 도로 총람에 따르면, 아랍인들은 자연환경과 금 자원이 풍부한 신라를 동경하여 많은 이들이 한반도로 이주해 정착했다.
반면, 해양 진출에 관심이 적었던 중국은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서야 대양항해가 가능한 배를 제작할 수 있었다. 당나라 시절에는 서역으로 가는 구도승들이 외국 배를 빌려야 했다. 이슬람 상업 세력은 16세기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1000년 동안 유라시아의 장거리 교역을 주도했다.
아랍어는 새로운 이슬람 제국의 공용어로 자리 잡았고, 무슬림 해군은 지브롤터에서 스리랑카까지의 항로를 활발히 이용했다. 9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통치자들이 하자르족과 계약을 맺어 스칸디나비아와의 교류를 촉진했다. 동쪽으로는 중국과의 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북아프리카 상인들은 사하라 사막을 넘어 카라반을 보냈다.
이슬람 금융
모함마드 사후 몇 세기 만에 그의 후계자들은 유라시아 대부분을 상업지대로 변화시켰다. 이 지역에서는 아프리카의 금, 상아, 타조 깃털과 스칸디나비아의 모피, 발트해의 호박, 중국의 비단, 인도의 후추 등이 거래되었다. 이슬람 정복 운동으로 활력을 얻은 아랍인들은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코르도바에서 문화적 르네상스를 이루었으며, 당시 최고의 문학, 예술, 수학, 천문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슬람 상업 네트워크에선 환어음, 대출제도, 선물시장 등 여러 선진적 시스템이 발전했고, 이슬람 제국의 문명은 당시 변방이었던 유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아랍어에서 유래한 영어 단어와 아라비아 숫자, 십진법, 대수학, 의학 기술 등은 유럽 르네상스의 기초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 탄생과 유대인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 제도는 중세 이슬람 사회의 ‘딤미’ 제도의 발전된 형태로, 다양한 소수 민족을 포함하는 다문화 정책을 반영다. 1453년 메흐메트 2세의 이스탄불 정복 이후 공식적으로 시행된 밀레트 제도는 무슬림 지배 집단과 비무슬림 소수 민족으로 구분되었다. 초기에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이 함께 포함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비무슬림 집단만을 지칭하게 되었다.
가장 큰 밀레트는 그리스 정교 공동체로, 이들은 이스탄불 대주교청을 중심으로 종교 행정을 운영했다. 아르메니아 정교 공동체와 유대인 공동체도 각각 독립적인 종교 행정을 유지하며 오스만 제국에 기여했다. 유대인들은 1492년 스페인에서 온 이민자들로, 오스만 제국은 이들을 받아들여 위기를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되었다. 각 밀레트의 종교 지도자들은 오스만 정부와의 중재 역할을 수행하며, 자신들의 공동체를 대표했다. 이들은 인두세를 징수하여 술탄에게 납부하는 의무가 있었지만, 국가 행정 직책이나 군대 복무의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재정 정책과 유럽 무역의 증가로 인해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도시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오스만 제국에서 대금업자, 은행가, 세금 징수 관리자 등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귀금속 세공업자와 상인으로도 활동했다. 오스만 제국 내의 소수 민족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그리스 정교인은 밀레트 제도 하에서 자신의 신앙, 문화, 언어 등을 자유롭게 영위할 수 있었다. 각 밀레트는 자체적으로 사법권을 행사하며, 최고 종교 지도자는 오스만 술탄에게만 책임을 졌다.
밀레트 제도에서는 딤미 공동체가 선출한 대표자들이 지즈야를 거두고 납부하며, 모욕적인 대우는 줄어들었지만, 관리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경멸적인 언어가 사용되었다. 한 기독교인은 오스만 제국에서 종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경험을 언급하며, 스페인에서의 박해와 대조된다고 말했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를 그리워하며, 기독교 정부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자유와 관용을 바랐다. 그러나 1856년 탄지마트 개혁에 따라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평등권이 인정되면서 지즈야가 폐지되고 이교도도 군인이 될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소수 민족 공동체와의 조화와 공존은 오스만 제국의 기본적인 통치 이념으로 남아 있었다.
15세기 에스파냐와 오스만 제국은 다민족, 다종교 주민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상이한 정책을 펼쳤다. 에스파냐는 문화적 ‘타자’에게 기독교도로의 동화를 강요하며, 개종한 유대인과 무어인을 신뢰하지 못하고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여 이들을 검증하고 결국 추방하는 강압적인 다문화 정책을 시행했다. 반면, 오스만 제국은 ‘딤미’ 제도를 계승하여 ‘밀레트’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문화적 ‘타자’에게 일정한 자치를 허용했다. 이 제도는 19세기 탄지마트 개혁을 통해 모든 종교인의 평등이 이루어질 때까지 유지되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오스만의 다문화 정책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15세기 에스파냐의 강압적인 동화 정책과 비교할 때 더 관용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화는 인간의 제2의 천성과 같으며, 동화 정책은 비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문화적 ‘타자’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의미가 퇴색된다. 따라서,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문화적 ‘타자’에 대한 인정과 존중은 사회 통합에 더 기여할 수 있는 모델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