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왕국의 분열 - 서양 중세사5
카롤루스 1세는 자신의 사후 제국을 분할하여 모든 아들에게 나누어 줄 계획을 세웠으나, 막내 아들 루트비히를 제외한 세 아들이 요절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813년, 아헨에서 루트비히가 공동황제로 선출되었고, 그는 유일한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이후 카롤루스는 은퇴하여 아헨에서 여생을 보내다 814년 1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루트비히 1세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후, 자신의 아들들에게 왕국을 분할 상속하기 위해 아버지의 서자들과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형제들을 수도원으로 보내버렸다. 817년에는 제국 칙령을 발표하여 장자인 로타르를 후계자로 정하고 공동 황제로 로타르 1세로 선포했다. 둘째 아들 피핀은 아키텐 왕으로, 셋째 아들 루트비히는 바이에른 왕으로 임명되었다. 이 바이에른의 루트비히는 아버지와 구분하기 위해 '독일인왕 루트비히'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카 베른하르트의 반란과 진압
카롤루스 1세의 차남 피피노 카를로마노 사후, 그의 서자인 베른하르트가 랑고바르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817년 황제 계승권에서 제외되자 반란을 일으켰다. 루트비히 1세는 베른하르트를 처벌하여 반란을 진압했지만, 이로 인해 황제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세 아들의 반란과 루트비히 1세의 복위
루트비히 1세는 823년 넷째 아들 카를이 태어나자 영지 분배 문제로 갈등이 커졌다. 세 아들은 830년과 831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833년에는 루트비히 1세를 폐위시켰다. 그러나 교황의 지지로 834년 복위하였고, 카를에게 더 많은 영지를 부여하였다.
영지 상속의 혼란 지속
838년 아키텐의 피핀 사망 후 영지 분배에서 갈등이 발생하였고, 귀족들은 피핀 2세를 왕으로 세우려 했다. 이로 인해 대머리왕 카를 2세와 피핀 2세는 분쟁이 생겼고, 독일인왕 루트비히도 불만을 품었다. 루트비히 1세는 바이킹의 습격에도 대응해야 했으며, 결국 독일인왕 루트비히의 반란을 진압하고 바이킹에게 프리슬란트를 내주는 조건으로 상황을 수습하였다.
내분의 결말
카롤링거 왕조의 단절과 영토 분쟁은 중세 유럽의 정치적 혼란을 초래했다. 840년 루트비히 1세의 사망 후, 그의 세 아들은 프랑크 왕국을 세 부분으로 나누기로 결정했다. 로타르 1세는 중프랑크 왕국을, 루트비히 2세는 동프랑크 왕국을, 카를 2세는 서프랑크 왕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형제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내전이 발생했고, 843년 베르됭 조약을 통해 프랑크 왕국의 공식적인 분할이 이루어졌다. 로타르 1세는 황제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실제 통치력은 제한적이었다. 이후, 그의 후계자들은 왕국을 다시 나누면서 영토 분쟁이 계속되었다. 875년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카를 2세는 로마 황제의 자리를 차지했으나, 카를만이 반발하며 분쟁이 이어졌다.
결국 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면서, 987년 서프랑크 왕국에서도 카페 왕조가 창건되었다. 이로 인해 로마 황제의 지위는 신성로마제국으로 넘어가고, 카롤링거 왕조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서유럽은 귀족 중심의 정치가 지속되며, 북이탈리아는 자치 도시로 분화되는 등 분열을 거듭하게 된다.
서프랑크 왕국 바이킹 침공
885년 11월 24일, 바이킹의 대규모 침공으로 서프랑크왕국의 파리가 위기에 처했다. 바이킹들은 내륙 도시 약탈을 목표로 삼아 4만여 명이 탄 700척의 선단을 구성하고 센강을 통해 공격했다. 방어군은 200여 명에 불과했지만, 두 개의 다리를 방어함으로써 침공을 저지하려 했다.
바이킹은 초기 공격에서 성과를 보지 못했으나, 파리 인근에서 소규모 약탈을 계속하며 방어군도 늘어났다. 결국 바이킹은 886년 가을 부르고뉴에서 약탈한 물품을 가지고 물러났다. 서프랑크왕국은 911년 바이킹에 대한 영구적인 해결책으로 고위직과 토지를 제공하는 협상을 통해 노르만공국을 성립시킴으로써 침공을 막았다.
이 과정에서 파리 방어전을 이끈 오도 백작이 서프랑크 국왕이 되었고, 전투에 참여한 대주교는 최초의 기독교 성직자로 기록되었다. 바이킹 침공은 후에 백년전쟁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유대인의 역사
기원전 135년 이전,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과 솔로몬의 전성기를 거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된 후, 각각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와 바빌론으로 이주하였고, BC 539년 페르시아의 점령으로 이들은 다시 풀려났다.알렉산더 대왕은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와 면세를 약속하며 알렉산드리아에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하게 했다. BC 63년 로마가 가나안 지방을 속국으로 삼고, BC 1세기 말에는 시리아,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이탈리아 등지에도 많은 유대인 공동체가 생겨났다.
기원전 66년, 유대인은 로마에 대항해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AD 132년에도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어 결국 가나안 지방을 떠나 유랑생활에 들어갔다. 이때 유대인 학자 요하난 벤 자카이는 유대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토라'를 기억하고 따르라고 강조하였고, 유대인들은 시나고그에서 토라 학습을 통해 정체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유대사는 고대 세계에서 유대인과 로마인 간의 복잡한 상호 작용을 다루는 중요한 역사적 주제이다. 기원전 63년 로마가 유대 지역을 정복한 이후,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유대인의 디아스포라가 확산되고, 유대교와 기독교가 발전하며,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와 탄압이 심화된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제공했다.
로마 제국 하에서 유대인들은 경제적으로 번성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로마의 통치와 종교적 관용 부족으로 인해 끊임없는 갈등과 반란에 직면했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서기 66-73년)과 바르 코크바의 난(132-136년)은 이러한 긴장과 갈등의 정점을 이룬 사건으로, 이 과정에서 유대 지역은 크게 파괴되고 많은 유대인이 희생되었다.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하스몬 왕조가 폐위되었고, 헤로데 대왕이 '유대인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서기 6년에는 유대 속주가 설립되었고, 이로 인해 유대인-로마 간의 긴장이 커졌다. 이러한 긴장은 서기 66년과 135년 사이의 유대-로마 전쟁으로 이어졌고, 70년에는 예루살렘과 제2성전이 파괴되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130년경 예루살렘에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새 식민지를 세우려 했다. 서기 1세기와 2세기 동안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330년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였고, 380년에는 기독교가 국교로 지정되었다. 이후 기독교 황제들은 유대인을 박해하고 그들의 권리를 제한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 지역의 역사적 연관성을 지우기 위해 유대 속주의 이름을 시리아 팔라이스티나로 변경하고, 예루살렘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꾸었다. 70년 이후 유대인들은 유대세를 내야만 종교 숭배를 허용받았고, 135년 이후에는 특정 날을 제외하고 예루살렘 출입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파괴와 박해는 유대인의 전 세계로의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유대인이 디아스포라에 참여하거나 여전히 유대에 남아 예루살렘 탈무드를 작업했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점차 로마 제국에 통합되었으나, 기독교의 성장으로 인해 제한이 강화되었다. 이로 인해 유대인 지역사회는 중동, 북아프리카, 유럽으로 분산되었고, 로마 유대인들은 근대에 도시 중산층과 관련된 성격을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