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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역사 42편 화폐의 발달 과정 서양 중세사4

by cellife 2024.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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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의 건국사 - 서양 중세사4

 

885년 11월 24일, 서프랑크왕국의 파리는 바이킹의 습격으로 공포에 휩싸였다. 서프랑크왕국은 843년 베르됭 조약에 의해 세분화된 프랑크왕국의 일부로, 그 이후로 대규모 공격을 자주 받았다. 특히 845년에는 120척의 배와 5,000명의 전사가 파리 일대를 약탈해 금 2,570㎏을 요구하며 물러간 사건이 있었다. 860년에도 세 차례의 침공이 있었고, 이로 인해 막대한 공물이 갈취되었다.

 

바이킹의 주요 목표는 내륙 도시의 약탈이었다. 센강을 따라 위치한 작은 도시 파리는 그들의 의도에 맞는 전략적 위치였다. 바이킹은 4만 명의 전사와 700척의 선단을 동원해 한꺼번에 공격했으며, 센강의 강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대규모로 움직였다. 그러나 방어군은 겨우 200명에 불과했으나 센강을 가로막는 두 다리만 지키면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바이킹은 두 개의 다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사이 방어군은 점차 강화되었고, 전투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결국 이상기후로 인해 방어가 위협받던 중, 협상이 성사되었다. 공납금으로 금 257㎏을 지급하고 부르고뉴에 대한 약탈권을 인정받기로 했다. 부르고뉴는 반란을 일으킨 상태였기에 서프랑크는 바이킹의 약탈을 묵인하게 되었다.

 

바이킹은 886년 가을, 부르고뉴에서 약탈한 재물을 가지고 물러났다. 하지만 공납과 약탈 요구는 계속되었고, 서프랑크왕국은 911년에 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영구해결책'을 제안했다. 이는 고위직과 토지를 하사 받고 다른 바이킹의 침입을 저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노르만 침입자들 덕분에 노르만공국이 성립되었고, 바이킹의 프랑크 침공은 여기서 멈추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서양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고, 프랑스와 영국 간의 백년전쟁의 시작점이 되었다. 파리 방어전을 이끌었던 오도 백작은 최초의 서프랑크 국왕으로 즉위하였고, 전투에 직접 참여한 대주교는 기독교 성직자 중 처음으로 전투에 나선 사례로 기록되었다. 또한, 바이킹이 전파한 음식문화인 뷔페 역시 그들의 풍속에서 유래되었다.

 

 

서양 최초 황제 신성로마제국 카룰루스 대제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두 번째 왕이자 서로마 황제로 대관된 카롤루스 대제는 프랑크족의 왕이면서도 황제로 불리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이미 멸망했기 때문에 그의 황제 직함은 명예직에 가까웠지만,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카롤루스 대제가 신성 로마 제국을 직접 창립한 것은 아니지만, 후에 신성 로마 제국을 창건한 오토 대제는 카롤루스 가문의 혈통을 강조하며 자신의 황제위의 정당성을 카롤루스 대제의 권위에 두었다. 이로 인해 카롤루스는 신성 로마 제국의 상징적 초대 황제로 여겨지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을 동로마 제국과 비견되는 제국으로 성장시킨 카롤루스 대제는 서로마 멸망 이후 서유럽을 다시 역사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뛰어난 군주이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문화와 경제력에서는 동로마 제국에 미치지 못했지만, 인구와 군사력에서는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의 군사적 확장은 서방 가톨릭 세계에 강력한 기초를 제공했으며, 문화적 부흥을 이끌어낸 점이 높이 평가받았다. 이로 인해 "서유럽은 카롤루스의 치세에 본격적인 부흥기를 맞이했다"는 전통적인 역사관이 형성되었다. 이후 카롤루스의 통치기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프랑스, 독일, 베네룩스, 이탈리아 등 서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그에게서 기원했음을 감안할 때, 그를 '유럽의 아버지(Pater Europae)'라고 부르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카롤루스는 거의 전설적인 인물로, 여러 유럽 왕국들은 그를 대제(大帝)라 칭하며 자신의 정통성을 프랑크 왕국에서 찾았다. 프랑스에서는 클로비스 1세와 함께 국부로 여겨지며, 중세 그리스도교와 기사도 문학에서 신화적인 전설로 신격화되기도 했다.

 

카롤루스 왕조의 직계가 끊어진 후에도, 이 왕조와의 연결을 중요시한 카페 왕조,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오를레앙 왕조 등은 모두 카롤루스 대제와 프랑크 왕국의 역사를 자국의 중요한 선조 역사로 여겼다. 그러나 근대 후기 내셔널리즘의 확산으로 프랑스인들은 고대 갈리아족에 대한 재인식을 하게 되었고, 게르만적 정체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카롤루스에 대한 폄하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반면, 클로비스 1세는 그러한 격하 현상이 덜했다. 이는 클로비스와 그의 메로베우스 왕조가 독일인 민족 형성에 미친 영향이 적었기 때문이다. 반면 카롤루스는 독일인 민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카롤루스 왕조의 수도 및 행정 관리 체계가 독일 쪽으로 더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더욱 두드러졌다.

 

전형적인 고대 말에서 중세 초중반의 게르만 왕국 전사왕의 성격을 지닌 인물은 아군에게 인자하고 관대하며, 적에게도 대범한 모습이지만, 일정 선을 넘으면 잔인하고 무자비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호색한으로 여러 번 결혼하고 많은 자식을 두었지만, 친딸들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결혼을 시키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특징은 전형적인 난세 속의 영웅적 성격을 잘 나타낸다. 물론, 친딸들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사생아가 많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는 중세 기준으로 술을 적게 마시는 편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하루에 한 잔만 마셨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의 술잔 크기를 고려할 때, 현대인 기준으로는 여전히 많이 마시는 편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가톨릭 교회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여 지방 통치 체계를 구축했다. 무력을 동반한 집단 강제 개종도 서슴지 않았지만, 아바스 왕조와의 관계는 상당히 가까웠다. 동로마 제국과는 정치적으로 갈등의 소지가 있었지만, 완전히 적대시하지는 않는 등 정치적 감각도 뛰어난 인물이다.

 

유럽 최초의 황제인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 대제)는 서기 812년경에 향후 농업과 정원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령을 제정했다. 그는 “제국 도시의 법령집(Capitulare de villis vel curtis imperii)”을 작성하고 이를 공표하였다. 이 법령집은 총 70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각 장은 몇 줄에서 몇 단원 정도로 짧은 법령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서는 영지 운영과 농업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하여 당시 농사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법령집에서는 삼포식 농업, 포도 재배 및 유실수 재배법, 양조 기술, 말, 소, 양, 돼지, 염소 등의 축산 관리, 양봉 및 양어장 조성과 관리에 관한 세부적인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농업 실천에 대한 중요한 참고 자료로 여겨지며, 카롤루스 대제가 농업 발전을 위해 기여한 바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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