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특징 서양 중세사3
중세 시대 서유럽에서 농노들은 하루의 70%에 이르는 시간을 영주를 위해 노동하며, 남은 시간에야 비로소 영주에게서 빌린 자신의 땅을 경작할 수 있었다. 영주는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고, 농노들은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살아가며 항상 도망칠 방법을 고민했다. 초기 장원을 탈출한 이들은 농사에 종사하는 농부가 아니라 수공업자들이었다. 수공업자들은 땅이 없어도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농부들보다 쉽게 장원을 떠날 수 있었다. 이들이 도망친 곳도 왕이나 영주, 사원의 장원이었지만, 그곳은 원료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안정적인 거래처를 찾을 수 있는 장소였다. 각 지역에서 온 도망자들로 북적이면서 이들은 서유럽 최초의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쾰른, 마인츠, 스트라스부르,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 에르푸르트 등이 있다.
이 도시들에서는 정교한 분업 체계가 형성되어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고, 수공업자들은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상품 경제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시가 성장하고 부유해짐에 따라 영주들도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도시에는 지속적인 발전과 상업 활동으로 많은 자금이 유입되었고, 돈은 곧 힘으로 변모했다. 도시 시민들은 영주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대신, 영주의 간섭 없이 자율적으로 도시를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11세기 후반, 서유럽에서는 도시가 급속히 발전하며 '상업 혁명' 시대가 도래했다. 도시의 거주민들은 봉건 제도의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민으로,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상품과 화폐의 유통은 도시의 신흥 귀족을 탄생시켰고, 이에 따라 봉건 제도의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민'이라는 새로운 용어도 등장하게 되었다. 시민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들의 생활 방식이 시장 교역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주요 관심사는 부를 축적하는 것이었으며, 그 해결책은 '자유'였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부를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봉건제도 의 경제 폐해
봉건제도는 8세기 경 프랑크 왕국이 이슬람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신하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기사를 양성하면서 형성된 주종관계를 의미한다. 왕으로부터 토지를 받은 제후, 신하, 사제들은 각 지방의 영주로서 기사를 양성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경작하게 하여 소작세와 각종 세금을 부과하며, 유사시 전쟁에 참여하거나 노역을 요구하는 계약관계를 맺었다. 이를 장원제도라고 부른다.
중세 유럽은 정치적으로 왕과 신하 간의 봉토를 기반으로 한 봉건사회였으며, 경제적으로는 농노의 노동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장원제도가 존재했다. 장원이란 영주가 지배하는 작은 마을을 의미하며, 영주는 이곳에서 왕과 같은 권력을 행사했다. 장원의 중심에는 영주의 성과 교회가 위치했으며, 농노들은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고 교회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농노는 농민과 노예의 중간적 존재로, 농토를 경작하고 영주에게 소작료, 결혼세, 사망세 등 다양한 세금을 납부해야 했으며, 거주의 자유가 없는 반노예의 신분이었다. 봉건제도는 게르만 민족이 서로마를 멸망시키고 카톨릭 교회를 통치 기반으로 받아들이면서 형성되었으며, 카톨릭 교회는 세속 권력과 결탁하여 봉건제를 확장했다. 기독교는 개인적 신앙을 넘어 교황, 주교, 사제 등으로 이어지는 위계질서를 통해 봉건사회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원리를 제공했다. 사제는 제후와 함께 봉건사회의 대토지 소유주가 되어 지배계층을 형성하였다. 카톨릭 교회와 수도원은 사상적 생산을 독점하며, 스콜라 철학을 통해 기독교 사상의 신학적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사상은 중세 유럽의 불평등한 위계질서와 신분질서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장원제도는 중세 유럽의 군사적, 경제적 기본 체계였지만, 농민들에게는 심각한 고통과 부담을 안겼다. 영주에게 바치는 소작료와 각종 세금으로 농민들은 착취당했으며, 이는 농노뿐만 아니라 자유민과 농민 모두에게 해당되었다. 14세기 십자군 전쟁 이후 교역과 경제의 발전으로 장원제도는 점차 해체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화폐 경제가 발전하여 영주들이 받는 세금이 줄어들었고, 결국 영주들의 권한도 축소되었다. 1381년, 영주 지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와트 타일러의 난’을 계기로 영국의 장원제도는 해체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유럽에서 장원 제도가 가장 먼저 해체된 사례로 기록된다. 그 결과 젠트리 계급이 등장하였고, 이는 농민보다는 높고 귀족보다는 낮은 새로운 중산층 계급으로 성장했다.
젠트리 계급은 16세기 중반부터 약 1세기 동안 영국 사회에서 그들의 지위와 경제력이 현저히 상승하였고, 하원 의원이나 지방 행정을 장악하는 등 당시 영국의 유력한 사회 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후에 청교도 혁명을 주도하며, 영국 민주주의 혁명의 핵심 세력이 되었고, 신대륙으로 건너가 미국을 건국하는 데 기여했다.
철학이 정의의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면, 중세 유럽 봉건사회의 장원제도는 자원 배분의 심각한 왜곡을 초래하고 있다. 영주가 왕으로부터 받은 봉토는 사실 국민들이 골고루 나누어 가져야 할 공공재이다. 그러나 이 공공재가 사유화되어 특권계층에 나누어지고, 영주들은 그 땅으로 호위호식하며 중세 시대를 암흑기로 만들었다. 하느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기독교 교리는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스콜라 철학자들은 기독교 사상을 이성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교황은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세속화하여 중세 암흑시대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충돌은 중세 봉건시대의 경제 상황과 어떤 차이가 크다.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은 과연 자신들의 노력에 합당한 대가를 받고 있는 지 모르는 시대에 있다. 사회 시스템의 미흡으로 인해 불로소득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가 중세 유럽의 봉건사회를 질타하듯이 우리의 자랑거리인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가? 철학은 정의를 탐구하고, 정의는 공정한 분배이며, 공정한 분배는 공동체 전체가 수용할 수 있는 합리적 사회 시스템의 발굴과 정착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경제 시스템이 중세 유럽의 봉건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또 다른 장원 제도는 아닌지 의심스러운 시대 환경이다.
바이킹 시대 약탈 경제후 국가 건설
클로비스는 강력한 힘으로 한때 유럽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을 무너뜨렸지만, 그와 그의 민족인 게르만족은 여전히 야만인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북쪽의 한 낙후된 지역에 새로운 야만족이 등장했다. 바로 바이킹족이다. 9세기와 10세기 동안 서유럽은 바이킹족으로 인해 악몽 같은 시기를 겪어야 했다. 국왕과 영주 모두 갑작스럽게 침입해오는 바이킹족의 약탈에 손쓸 방법이 없었다. 이 시기를 '바이킹 시대'라고 부른다.
바이킹족은 9세기 전부터 유럽 전역을 침입하기 시작했고, 특히 브리튼 섬의 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영국해협은 바이킹들이 유럽 대륙을 약탈할 때마다 지나가는 통로가 되었다. 결국, 잉글랜드 북동부 지역에는 바이킹족이 정착하게 되었고, 그들만의 관습과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갔다. 이 지역은 훗날 '데인로'로 알려지게 된다.
바이킹족은 유럽인들을 약탈하며 고통을 주었지만, 역설적으로 도시와 상업의 부흥을 가져왔다. 영주의 장원 중심의 '소농 경제'는 파괴되었지만, 식민지 탐험과 해상 무역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의 무역상은 해적들이었고, 이는 프랑크 왕국 시절에도 있었지만 주로 육지에 국한되어 있었다.
바이킹족이 약탈을 통해 모은 자금은 상업 자본으로 변모했으며, 동양과 아라비아 지역의 상인들은 이 자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9세기 후반,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황무지에는 번화한 상업 지구가 형성되었고, 비르카 시장에서는 향료, 비단, 양모, 포도주, 유리, 청동기 등 다양한 사치품이 거래되었다. 862년, 바이킹족은 슬라브 지역에 키예프 공국을 세우며, 주변 성을 돌아다니며 밀랍과 모피 등을 수집해 매년 콘스탄티노플로 운송했다. 아라비아 상인들이 지중해 상권을 장악하며 비싸게 팔던 동양 상품의 가격이 하락하면서 유럽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911년, 바이킹족의 수장 롤로가 노르망디 공국을 세우고 본격적인 상업 활동에 나섰다. 그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북해까지의 항로를 개척하며, 이 항로는 유럽 해상 무역의 주요 통로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무역 활동은 도시 발전과 경제 부흥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10세기 후반, 대부분의 바이킹족은 해상 무역에 종사하게 되었고, 강력한 왕권 체제가 등장하면서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 1000년 무렵, 북유럽인들은 기독교에 동화되어 대부분 개종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