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마 화폐와 멸망 중세의 서막 서양 중세사2
고대에는 전통적으로 금화나 은화가 화폐로 널리 사용되었다. 로마 제국의 솔리두스 금화와 영국의 소버린 금화 등은 국내외에서 흔히 거래되었던 화폐이다. 금화는 그 자체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어 신뢰도가 높았지만, 무게로 인해 휴대성이 떨어지고, 발행 과정이 복잡하여 지폐에 비해 발행량과 유통 속도가 부족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금을 보유하고, 화폐 가치를 금과 연동하여 신뢰성 높은 칭량화폐를 발행하는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즉 칭량화폐인 금속화폐는 금 교환증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화폐 체계를 금본위제라고 한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유럽은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변혁의 시기 속에서 프랑크왕국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화폐 체계의 발전 또한 이뤄졌다. 서로마 제국 시대의 금화와 은화는 그 자체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지만, 중세의 불안정한 정치 환경 속에서 안정적인 화폐 시스템이 필요해졌다.
프랑크왕국은 카롤루스 대제의 통치 아래 통일된 정치체제를 구축하면서, 경제적 안정성을 도모하기 위해 새로운 화폐 체계를 도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프랑크왕국의 화폐는 단순한 교환 수단을 넘어,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신뢰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프랑크왕국의 화폐 발전은 중세 유럽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며, 이후 유럽의 화폐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프랑크왕국의 화폐에 대한 연구는 단순한 경제적 현상을 넘어, 당시 사회의 정치적 및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된다.
서유럽의 탄생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로마의 북쪽 지역은 광활한 황무지로 변모하였다. 이곳에는 파란 눈동자와 오뚝한 코, 금발 머리를 지닌 야만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바로 오늘날 유럽인의 조상이 된 게르만족이다. 게르만족은 농업과 목축, 사냥에 종사하며 다양한 부족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의 번영을 수세기 동안 지켜보면서, 로마를 무너뜨릴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서기 306년부터 337년까지 로마의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는 가장 가혹한 통치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통치 아래 로마 제국의 황제 지위는 세습제로 정착되었지만, 귀족들은 황제의 명령을 쉽게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노예 계급을 지배하면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자신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가해지면 황제를 끌어내리는 데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콘스탄티누스는 귀족의 권력을 대체할 수 있는 집단을 찾아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용병이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티누스 시대부터 용병이 고용되었지만, 당시에는 총 병력의 40%에 불과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를 90%로 끌어올리며, 북방의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활용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용병을 고용하고 통제하기 위해 자금을 마련한 방식은 다음과 같다.
화폐 주조의 강화가 있었다. 솔두리스, 세미스와 같은 순도가 높은 금화와 은화, 동화가 발행되면서 화폐 시스템이 정비되었다. 모든 상업과 수공업을 철저히 독점하였다. 이 시기에는 세계적으로 유일한 관료 관리 체계가 확립되었으며, 모든 수공업은 길드의 관리 하에 세습제로 운영되었다. 세수는 관료들이 심사하고 결정했으며, 시민들은 수입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세금을 정확히 납부해야 했다. 콘스탄티노플(비잔틴)으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와는 다른 성격의 도시로, 로마가 자연스럽게 상업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한 반면, 콘스탄티노플은 세속적 권력이 중심인 도시로 자리잡았다. 이 도시는 페르시아 제국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에 대적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필요로 했다.
또한, 로마 제국은 국민의 재산 대부분을 몰수하였고, 황실과 귀족들은 고가의 사치품을 수입하여 로마 제국 내의 금과 은이 대량으로 유출되는 현상을 초래했다. 로마 제국의 은광은 거의 고갈 상태에 이르렀고,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는 솔리두스 금화의 금 함량이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비해 100분의 1로 줄어들었다.이로 인해 화폐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고, 상당수 지역에서는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통치 기반마저 무너져 내리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동서양 문명의 첫 번째 대결은 유목 민족을 내쫓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이 흉노족을 만리장성 너머로 내몰았던 시점에서 로마 제국은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때, 중국의 흉노 기병은 로마에 압력을 가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대결에서는 서유럽이 야만족에게 패하게 되었고, 군사력의 감소로 인해 로마 제국의 식민지에 대한 통제력도 점차 약화되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를 정복한 게르만족들은 여러 부족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이 시기에 형성된 국가들 중에는 서고트족이 세운 서고트 왕국(이베리아 반도), 동고트족의 동고트 왕국(이탈리아 반도), 프랑크족의 프랑크 왕국(갈리아 지역), 부르군트족의 부르군트 왕국(남프랑스 론강 일대), 그리고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 반도에 세운 여러 왕국이 포함된다. 게르만족은 하나의 통일된 집단이 아니라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부족의 지도자들은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서로를 견제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평'과 '권력 분할'이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이는 서유럽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으나 금융 발전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화폐의 필요성이 사라지면서, 자급자족하는 체계가 자리 잡게 되었다.
결국 서유럽은 봉건사회로 전락하게 되었고, 이 시점에서 동방은 서유럽보다 더 발전된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000년 후 현대 유럽 문화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예상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게르만족이 분권적인 체제를 이루지 않았다면, 훗날 동등한 신분의 투자자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문명의 저력 아래에서 서양의 금융 시장은 일정한 평등권을 보장받았다. 즉, 시장을 운영하는 이들의 신분은 동등했지만, 시장의 통제권은 여전히 강자의 손에 있었다.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476년, 게르만족 출신의 로마 용병대장 오토아르케는 여섯 살의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며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 당시 서로마 제국은 이미 명목상 존재에 불과했다.클로비스는 서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481년에 여러 프랑크 부족을 통합하여 센 강 유역에 프랑크 왕국을 세우고 파리를 수도로 삼았다. 그는 진정한 게르만 왕조인 메로빙거 왕조를 창립하였으며, 그의 후손들은 751년까지 서유럽을 통치했다. 클로비스가 통치하던 시기에는 서유럽의 금융 상황이 미비했고, 문자가 없던 시절에 화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노예들을 공정하게 분배하고, 이들을 영주로 임명하였다. 그 후 영주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봉건체제에서 형성된 '영주-기사' 관계는 계약적 성격을 띠며 서로의 의무와 책임이 명확히 규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영주는 전투 중에 기사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고, 기사는 영주를 위해 병역을 수행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책임을 지녔다. 황제는 영주들의 신하들에게 아무런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는 봉건 영주제가 단순한 권력이 아닌 계약관계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클로비스는 알라만족과의 전투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이 승리를 안겨주신다면 기독교로 개종하겠다고 맹세했다. 전투에서 운 좋게 최종 승리를 거두자, 그는 신하들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이로 인해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기독교 국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서유럽은 오랜 기간 동안 분열 상태에 있었고 여러 국왕들이 등장했지만, 유럽인의 정신과 문화는 로마 교황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권력적으로는 여러 개의 분열된 국가들이 존재했지만, 신앙과 교회 측면에서는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형성한 것이다.
클로비스는 죽기 전에 아들 넷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었고, 이는 궁재가 왕권을 제압하는 데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궁재 카를 마르텔의 지시로 다고베르트 국왕이 암살당한 뒤, 카를 마르텔은 어린 왕자들을 황제 자리에 연이어 앉혔다가 15세가 넘으면 강제로 폐위시키며 국왕을 실권 없는 허수아비로 만들었다.카를 마르텔은 왕위에 오를 수 없었고, 프랑크 왕국의 국왕이 되기 위해서는 교황의 승인이 필요했다. 이른바 '왕권신수설' 때문이다. 결국, 카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가 반란을 일으켜 교황에게 실권 있는 자가 국왕이 되는 것이 낫다고 질문하고, 교황의 암묵적인 승인을 얻었다.
피핀은 수아송 회의를 열어 마지막 국왕 히델리히 3세를 폐위시키고, 교황 스테파노 3세의 배석 아래 대관식을 치르며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다. 그는 교황에게 보답하기 위해 756년에 로마 교황청의 통치 구역을 회복해 주었고, 이 지역이 현재의 바티칸 시티가 되었다. 피핀의 아들 샤를 마뉴는 왕위를 계승하여 45년 동안 55차례 해외 정벌을 감행하며 유럽 대륙 대부분을 차지하고, 왕국을 통치하기 위해 영주들의 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영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유럽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한 샤를 마뉴는 왕국을 통치하기 위해 먼저 영주들의 세력을 무력화하는 데 집중했다. 이를 위해 영지를 빼앗고, 영주들의 땅을 사들이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755년, 피핀 3세는 조폐 공장을 설립하고 순은 1파운드당 22개의 은화를 제작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중세 시대의 영주들은 중국의 지주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중국의 지주는 단순히 토지만 소유했지만, 영주는 토지뿐만 아니라 그 땅에 사는 사람과 동물 등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졌다. 농노와 기사는 영주에게만 충성을 다하며 국왕에게는 충성할 필요가 없었다.
영주들은 의식주뿐만 아니라 수공업까지 장원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영지 내에서 시장을 형성하여 세금을 징수했다. 이들은 유통되는 화폐를 녹여 납과 주석을 혼합하여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냈고, 이로 인해 왕실은 점점 가난해지고 영주들은 더욱 부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