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고대사16 로마의 금융사 몰락의 원인
수천 년 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금화, 은화, 동화가 주요 화폐로 사용되었다. 이 통화의 중요한 요소는 각각의 금과 은, 구리 함유량이었다. 종이로 만들어진 지폐는 찢어지면 그 가치가 사라지지만, 금화와 은화는 부수거나 녹여도 본래의 가치를 거의 유지한다. 이는 이들 화폐가 실질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화폐에 포함된 금과 은의 양이 그 화폐의 가치를 결정한다.
로마 제국에서는 은화의 은 함유율이 5%로 급락하면서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동화를 폐지하고 원로원에서 화폐 주조권을 빼앗았다. 따라서 해당 화폐에 액면가 만큼의 금과 은이 포함되어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정부가 100% 순은화라고 발표했으나 실제로 은 함유율이 50%에 불과하다면, 그 화폐의 가치는 급락하게 되고 이는 인플레이션과 경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정부는 화폐 발행을 직접 관리하며 금과 은의 함유율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로마 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3세기 후반,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 사이에서 화폐 부정이 발생하면서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이로 인해 당시 황제 아우렐리아누스는 화폐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게 된다. 로마 제국의 화폐 주조소는 리옹과 로마 두 곳에 있었으며, 리옹에서는 아우레우스 금화와 데나리우스 은화가 발행되었고, 로마에서는 세스테르티우스 동화가 주조되었다. 그러나 서기 260년, 포스트무스의 반란으로 ‘갈리아 제국’이 성립되면서 이 구조가 흔들리게 되었다. 이후 리옹에서 발행된 화폐를 사용할 수 없게 된 제국은 수도 로마에서 금화와 은화까지 주조하게 되었다. 문제는 로마의 화폐 주조를 관리하는 원로원 의원들이 비리의 유혹에 빠지게 되면서 발생했다.
외부 침입 와 내부 부패 및 화폐 남발로 인한 위기의 로마
로마 제국은 흔히 야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 과정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특히 ‘3세기의 위기’라고 불리는 3세기 동안에는 매년 수십만 명의 야만족이 로마를 습격했다. 그러나 야만족의 침입은 단지 결과에 불과하며,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극심한 재정난과 은화의 평가절하로 인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이었다.
당시 로마는 북방 야만족의 침입으로 인해 ‘3세기의 위기’라고 불릴 만큼 고통받고 있었고, 황제는 군대를 이끌고 여러 전선에서 싸우느라 바쁜 상황이었다. 황제가 자신의 제국 수도인 로마에 거의 방문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이로 인해 로마 사회의 엘리트인 원로원 의원들이 내정을 사실상 책임지게 되었다. 그들은 황제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화폐 주조소에서 금과 은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량씩 빼돌리던 이들이었지만, 곧 “비리로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이들이 이 과정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이들의 부정축재가 심각해지면서 금화의 중량은 기존의 6.5g에서 6g 이하로 감소했고, 은화의 은 함유율은 겨우 5%로 떨어졌다. 이 정도면 실제 은화라기보다 은으로 도금된 화폐라고 불러야 할 수준이었다.
특히 문제였던 것은 은화의 은 함유율 하락이었다. 로마의 기축통화는 데나리우스 은화로, 아우레우스 금화는 통화라기보다는 오늘날의 채권처럼 재산 보존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세스테르티우스 동화는 주로 잔돈 교환용으로 활용되었고, 군인 및 관료의 봉급 지급, 세금 징수, 부동산 및 동산의 매매 등은 대부분 은화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은화의 신뢰도는 매우 중요한데, 이 은화의 은 함유율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큰 혼란이 발생했다. 은화의 가치가 떨어지자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나타났으며, 고대사회에서 인플레이션이 드문 시기였던 만큼 로마 시민들이 겪은 충격과 혼란은 매우 컸다.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절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는 3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붕괴되었다. 북방의 야만족들은 라인 강이나 도나우 강을 넘어 로마를 끊임없이 공격해 왔다. 초기에는 로마군이 이들을 손쉽게 처치했으며, 야만족의 영토에까지 쳐들어가 큰 타격을 주기도 했다.
270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로마를 습격한 수십만 명의 반달족과 맞서 싸웠다. 반달족이 도나우 강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에 진입하자, 그는 중부 메타우로 강변에서 적을 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이어 북부 파비아에서 남은 무리들을 소탕하며, 도나우 강 너머로 돌아갈 수 있었던 반달족은 극소수에 불과할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야만족들은 게르마니아의 척박한 땅에서 생존하기 어려워 로마를 약탈하기 위해 계속해서 몰려왔다. 굶어죽는 것과 싸우다 죽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기에, 그들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공격을 감행했다. 이와 동시에 서쪽의 사산 조 페르시아 역시 로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로마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도 대부분 승리했으나, 전투가 계속되면서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임기 첫 해를 화려한 승리로 장식한 아우렐리아누스는 개선식을 겸해 수도 로마를 방문했다. 그는 동시대 역사학자들로부터 “오랜만에 로마인의 혼을 지닌 황제가 나타났다”는 찬사를 받을 만큼 유능한 지도자였다. 군인 출신이었지만 단순한 전투의 용사가 아니라 군대 운영과 경영에도 능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감시가 없다는 이유로 금과 은을 마구 빼돌리던 원로원 의원들의 부정행위는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곧 발각되었다. 그는 '늘 칼에 손을 대고 있는 아우렐리아누스'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엄격한 성격의 황제였으며, 국가의 재산을 착취하는 ‘흰 개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즉시 화폐 주조소와 관련자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처벌을 두려워한 주조소의 기술자들과 일꾼들은 “억울하다”며 파업을 선언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비리를 저지른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의 행위를 숨기기 위해 다양한 변명을 내놓았다. 그들은 “야만족의 침입과 삼분된 제국의 상황 때문에 국세 수입이 감소한 것이 은화의 은 함유율 하락의 주된 원인이지, 부정행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로마는 서쪽의 갈리아 제국과 동쪽의 팔미라 왕국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삼분된 상태에 있었다. 특히 부유한 동방 속주들이 팔미라 왕국으로 독립한 것은 로마의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들의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부정행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 잘 아는 황제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기술자와 일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는 아벤티노 언덕으로 군대를 급파했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군대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7,000명에 달하는 기술자와 일꾼들이 목숨을 잃었고, 로마 시 전체는 공포에 휩싸였다.
군대는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는 존재이다. 대지주가 연간 10만 석의 쌀을 수확하더라도, 그가 운영할 수 있는 사병 규모는 겨우 500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군대를 이동시키고 전투를 진행할수록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또한 전투에서 사망한 병사를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병사를 징집하면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들어 세수도 감소하게 된다. 야만족은 약탈이 목적이었기에, 로마 정규군과의 전투를 피하고 방어력이 약한 마을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결과적으로 로마의 북부 지역은 점점 황폐화되었고, 농지에서 사람들이 떠나면서 세수는 더욱 감소했다. 들어오는 세금은 줄어드는 반면, 지출은 늘어나면서 로마 정부의 재정난은 심각해졌다. 처음에는 국채를 발행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곧 한계에 봉착했다. 정부가 빚을 갚지 않는 사례가 발생하면서 귀족과 부자들은 국채 매입을 기피하게 되었다.
세금을 인상하는 것은 반란의 위험이 크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먼 훗날 유럽 각국 정부가 지폐를 발행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하게 되지만, 이 시기에는 지폐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로마 정부는 해서는 안 될 ‘악마의 수단’인 은화의 평가절하를 선택하게 되었다.
이제 화폐 부정 수사를 막을 사람은 없었지만, 조사해도 ‘꼬리’와 ‘몸통’만 드러날 뿐, 금은을 빼돌린 진짜 ‘머리’, 즉 원로원 의원들은 잡을 수 없었다. 비서관들이 원로원 의원들에 대한 연루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보고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271년 봄이 다가오고 있었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에 부정부패 수사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국가의 엘리트이면서도 국고를 좀먹은 원로원 의원들을 용서할 수 없었던 그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벌을 주기로 결심했다.
마는 처음부터 제국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전환한 국가였다. 공화정 시기에는 원로원이 나라를 다스리는 중추 역할을 했다. 이런 연유로 제정 이후에도 원로원의 권위를 존중하기 위해 금화와 은화는 황제의 이름으로 발행되었으나, 동화는 원로원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동화에 새겨진 ‘S’와 ‘C’는 ‘Senatus Consulto’, 즉 ‘원로원 발행’을 의미했다. 동화 주조소가 리옹이 아닌 로마에 위치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동화의 발행을 중지하면서 원로원이 가진 최고의 영예를 없애버렸다. 이는 원로원 의원들의 명예를 크게 훼손한 것으로, 현대의 국회의원 ‘불체포 특권’ 폐지에 비유할 수 있을 만큼 충격적인 결정이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분노했지만, 황제는 그들의 반발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는 “국세 수입 감소가 원인이라면 은 함유율을 공식적으로 5%로 정할 수밖에 없다”며 “은 도금화와 동화는 사실상 가치 차이가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렇게 자신들의 입장에 발목이 잡힌 원로원 의원들은 황제의 주장을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의 원망을 무시한 채 군대를 이끌고 서방으로 출정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팔미라 왕국을 신속하게 정복한 후 갈리아 제국까지 병합하여 로마 제국을 다시 하나로 통합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의 공적은 대단하여 황제를 미워하던 원로원조차 ‘Restitutor Orbis(제국을 회복한 자)’라는 명예로운 별칭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지나친 엄격함이 그에게 해가 되었던 것일까 전쟁터에서는 무적이었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뜻밖에도 죄를 지은 후 처벌을 두려워한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그는 275년 4월에 사망하였으며, 만으로도 채 5년도 안 되는 짧은 재위 기간을 가진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화폐 남발로 인한 초물가상승 망가진 로마 경제 결론
로마 제국의 경제 위기는 은화의 신뢰도 상실에 기인했다. 초기에는 100% 순은으로 만들어진 데나리우스 은화가 시민들의 신뢰를 얻었으나, 네로 황제를 시작으로 은 함유량을 줄이는 평가절하가 이어졌다.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결국 은화의 가치가 급락하면서 경제가 마비되었다.
‘3세기의 위기’ 동안 은화의 함유량은 5%까지 하락했고, 이는 더 이상 은화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100% 순은의 아르겐테우스 은화를 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러한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그는 은본위제를 금본위제로 전환하고, 솔리두스 금화를 주요 통화로 사용하게 함으로써 로마 경제에 새로운 숨통을 불어넣었다. 그의 조치는 경제적 혼란을 극복하게 했고, 이는 그가 대제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이다.
결국, 콘스탄티누스의 통치 아래 동로마 제국은 그 후 1000년 이상 존속하게 되었으며, 그의 업적은 단순히 경제 회복에 그치지 않고,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