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재력을 동시에 휘두른 로마의 정치인 크라수스 - 서양 고대사15
크라수스는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생전에 형성한 재산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의 주요 재산 형성 수단은 경매와 비리였다. 로마의 내전에서 승리한 원로원파의 영수인 술라의 지휘 아래, 크라수스는 적들의 재산을 헐값에 사들여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그는 허위신고를 통해 죄 없는 사람들을 고발하고 재산을 빼앗는 데 앞장섰다. 또한, 크라수스는 소방관을 매수해 불이 난 집의 주인들과 협상하여 싸게 주택을 사들였다. 이를 통해 그는 서민형 임대주택인 '인술라'를 운영하며 큰 수익을 올렸다. 이처럼 경매와 비리를 통해 크라수스는 로마 역사상 최고의 부자로 자리 잡았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로마 역사상 최고의 갑부로, 그의 재산은 1억7040만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했다. 이는 당시 로마의 연간 예산 2억 세스테르티우스의 90%에 해당하며, 현대 화폐로 환산하면 약 1698억 달러로 평가받고 있다. 크라수스는 영악하고 비열한 수단으로 부를 쌓았으며, 그의 재테크 방식은 당시 상류층조차 혐오할 정도로 비도덕적이었다. 지나친 탐욕은 결국 그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크라수스는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생전에 형성한 재산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의 주요 재산 형성 수단은 경매와 비리였다. 로마의 내전에서 승리한 원로원파의 영수인 술라의 지휘 아래, 크라수스는 적들의 재산을 헐값에 사들여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그는 허위신고를 통해 죄 없는 사람들을 고발하고 재산을 빼앗는 데 앞장섰다.
크라수스는 기원전 87년에 부친으로부터 700만 세스테리우스라는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의 아버지 푸블리우스는 유명한 원로원 의원이자 전쟁 영웅으로, 기원전 97년에는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으나,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 중 술라 편을 들다가 마리우스 측에 의해 살해되었다. 크라수스는 부친의 재산을 물려받기 전, 마리우스의 숙청을 피해 히스파니아로 피신했다.
기원전 84년에 술라의 심복이 된 크라수스는 기원전 82년 술라의 로마 진군 당시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비열한 방법으로 부를 늘렸다. 마리우스파의 숙청 과정에서 몰수된 자산을 상당 부분 차지하였고, 사설 소방대를 조직하여 공익이 아닌 사익을 위해 활용했다. 그는 진화 요금을 미리 지불한 건물만 화재를 진압하고, 요금을 내지 않은 건물은 방치하여 불에 타도록 하여 그 부동산을 시세 이하로 사들였다. 그 후, 불탄 부지에 새로 집을 짓고 원하는 가격에 세를 놓는 방식으로 부동산을 늘리고 재산을 불렸다. 또한, 불이 난 집터를 팔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비싼 이자를 받고 자금을 빌려주며 더 많은 이익을 챙겼다.
또한, 크라수스는 소방관을 매수해 불이 난 집의 주인들과 협상하여 싸게 주택을 사들였다. 이를 통해 그는 서민형 임대주택인 '인술라'를 운영하며 큰 수익을 올렸다. 이처럼 경매와 비리를 통해 크라수스는 로마 역사상 최고의 부자로 자리 잡았다.
크라수스는 고리대금업 외에도 은광과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며 경제적 기반을 확장했다. 그는 자신의 은광과 농장에서 일할 노예를 대량으로 소유했으며, 노예 매매에도 참여했다. 크라수스는 노예를 교육하여 다양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고, 책 읽어주는 사람, 집사, 요리사 등을 양성했다. 이렇게 교육받은 고급 노예들은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그가 이처럼 돈 모으기에 집착한 이유는 단순한 재산 축적이 아니라, 돈을 통해 권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경제사학자 피터 번스타인에 따르면, 로마 공화정은 금과 은의 시대였으며, 이 자원에 대한 수요는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에서 10만 명의 노예를 로마로 데려온 것은 이러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크라수스는 권력을 얻기 위해 돈에 대한 집착을 지속하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로마의 전쟁 영웅이자 유력 정치인으로, 내전 중 귀족파인 술라를 지지하다 마리우스 일파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으나, 암살 위험을 피하기 위해 히스파니아로 피신했다. 이후 술라의 휘하에서 군공을 세우며 자신의 입지를 다진 크라수스는 로마로 돌아와 아버지의 재산권을 인정받고 상류층으로 복귀했다. 그는 술라의 정치적 영향력을 활용해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고, 정복 전쟁을 통해 얻은 전리품으로 라티품티움을 소유하게 되었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정적들의 재산을 강탈하며 부를 더욱 늘려갔다. 이러한 행위는 고대 로마 상류층 사이에서 흔히 발생하는 권력 암투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부유한 로마인들은 자신과 가족의 몸에 금을 장식하거나 저택을 화려하게 꾸미며 재력을 과시했다. 보유한 금화의 양은 곧 재산의 규모를 나타내었으며, 로마에서는 공화정 시기와 이어지는 제정 시기 모두에서 재력이 정치력으로 직결되는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 금권정치가 만연한 로마 사회에서는 부모의 직책보다 개인의 재산이 국정에 대한 발언권을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했다. 재력은 정치적 동맹을 형성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러한 재력으로 인해 확보한 발언권은 결국 뇌물이나 약탈을 통한 이익을 가져오는 데 영향을 미쳤다. 돈과 권력은 서로 영향을 미치며 순환하는 구조를 형성하고, 재력이 권력을 낳고 권력이 다시 재력의 확대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금권정치의 본질로 자리 잡았다.
권력은 재물이 따라온다. 정쟁의 역사
크라수스는 이렇게 모은 재산을 통해 더 많은 자금을 관리들에게 뇌물로 제공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정부에 몰수된 부동산을 시세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대량으로 사들일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더욱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으며, 크라수스는 거대한 현금 자산과 대규모 토지를 보유함으로써 로마 최대의 부자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재산 축적은 그의 정치적 발언권을 더욱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기원전 73년,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 진압을 맡게 되었다. 이는 그가 단순히 돈만 많은 인물로 여겨지던 자신에게 전공을 세울 기회를 제공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로마의 명장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모두 로마를 비운 상태였기 때문에, 크라수스는 그들의 빈자리를 메우며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반란은 기원전 73년, 이탈리아 반도 중남부 카푸아에 위치한 검투사 양성소에서 시작되었다. 트라키아 출신의 검투사 노예 스파르타쿠스가 여러 동료들과 함께 탈출하면서 이 사건이 촉발되었다. 로마는 법무관 가이우스 클라디우스 글라베르에게 2개 군단을 맡겨 반란 진압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듬해 봄, 로마 원로원은 집정관 루키우스 겔리우스 푸블리콜라와 그나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를 진압에 나서게 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결국 원로원은 법무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2개 군단과 새로운 6개 군단을 합쳐 총 8개 군단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크라수스는 반란 진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첫 번째 전투에서 패배하자, 그는 군단 전체에 가혹한 처벌을 내리기로 했다. 그는 ‘10분의 1형(decimatio)’이라는 잔혹한 집단 형벌을 시행했는데, 이는 군기 해이나 불명예스러운 사건이 발생한 군단의 병사 10명 중 1명을 무작위로 처형하여 나머지 9명이 그를 둘러싸고 돌멩이나 채찍으로 죽을 때까지 때리도록 강요하는 비인간적인 방식이었다. 크라수스의 명령으로 이 형벌로 인해 사망한 로마 병사는 약 4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을 진압한 후, 크라수스는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
기원전 59년, 제1차 삼두정치가 성립되었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아 원로원에 맞서기 위한 협약을 맺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파 비불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고,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외동딸과 결혼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지원으로 농지법을 개혁하고 원로원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56년, 세 사람은 루카에서 만나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각각 히스파니아와 시리아의 속주 지휘권을 확보하기로 합의했다.
크라수스는 재산 회복에 힘쓰며 술라의 마리우스파 숙청에 편승하여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다. 그는 은광산의 노예 거래와 화재 피해자의 재산을 악용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으나, 정치적으로는 평판이 좋지 않았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6년부터 동방에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며 미트라다테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아르메니아를 로마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폼페이우스는 유프라테스 강 서안까지 진출하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동방의 영토를 로마의 영향력 아래 두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61년, 폼페이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동방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 번째 개선식을 개최했다. 그는 로마에서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으나 보수파 귀족들의 의심을 받았다. 원로원과 협력해 퇴역병을 위한 토지 분배를 시도했으나 어려움을 겪었다.
크라수스는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했지만, 평범한 로마 시민과 정치 동지들로부터 경멸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요한 인물로 대접받았고, 두 번의 집정관직과 함께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삼두 정치'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않고 명예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60년,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원로원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았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집정관 당선을 지원하기로 하고, 카이사르는 그의 퇴역병을 위한 토지 분배를 추진하겠다고 비밀리에 합의했으며, 크라수스도 이 협력 관계에 참여하게 되었다.
기원전 59년, 카이사르는 원로원파인 비불루스와 함께 무사히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외동딸 율리아와 결혼하고, 카이사르는 루키우스 피소의 딸 칼푸르니아와 결혼하여 동맹을 강화했다. 집정관이 된 후,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협약에 따라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지원을 받아 농지법을 개혁하고 원로원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에 카토와 키케로와 같은 원로원파는 저항했지만, 퇴역병과 민중을 동원한 삼두정치파의 압박에 의해 그들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공동집정관 비불루스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카이사르는 사실상 남은 임기를 혼자서 집정관직을 수행했다.
기원전 56년, 세 사람은 루카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이해관계를 재조정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다음 해 집정관 선출에 대한 약속을 받았고, 각각 히스파니아와 시리아의 속주 지휘권을 맡기로 하였으며,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지휘권을 5년 더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금력을 통해 권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기원전 65년에 감찰관에 오른 그는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빚에 시달리는 원로원 의원들과 명망 있는 인물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며 '스폰서' 역할을 했다. 기원전 62년에는 젊은 정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도 자금을 대주며 그의 신뢰를 얻으려 했다. 카이사르는 스페인 히스파니아에서 재무관 직무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상당한 금액을 가져왔고, 이를 통해 로마 시민들의 환심을 사려 했다. 그러나 그가 확보한 금으로는 원하는 만큼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의 재력을 통해 성공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 사이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카스피해에 이르는 소아시아와 카프카스 지역, 예루살렘을 로마의 영토로 편입시키며 세력을 확장했다.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의 금력과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인기를 활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를 설득해 세 사람의 동맹인 제1차 삼두정치 체제를 형성했다. 이 시스템은 카이사르의 정치적 야망, 크라수스의 재력, 폼페이우스의 전공이 서로를 보완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이는 로마 전통의 공직 시스템을 무시한 권력자들의 결탁이었다.
기원전 55년,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와 함께 두 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이는 초법적인 선출이었다.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의 총독으로, 크라수스는 시리아의 총독으로 5년간 파견되었다. 크라수스는 자신을 단순히 '돈 자루'로 여기는 로마 시민들에게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구체적인 전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후 이웃나라 파르티아에 전쟁을 걸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에 필적하는 전공을 세우고 싶어 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컸던 크라수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의 일원으로 로마를 통치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 비해 군공이 부족했던 그는 공명심이 강해졌다.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무리한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했으나, 이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했다. 4만 4천 명의 병력 중 겨우 1만 명만이 돌아올 정도로 참담한 결과를 겪었고, 이로 인해 자신의 목숨과 아들, 로마 군단을 잃게 되었다. 결국 로마는 파르티아에 대한 동진을 포기하고 시리아 방어에 만족해야 했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4만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진격했다. 그러나 그는 파르티아 깊숙이 들어가 함정에 빠졌다.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파르티아 군과 마주한 크라수스는 역사상 최대의 패배로 기록되는 '카레 전투'에서 패했다. 파르티아 왕 오도데스 2세의 수하인 수레나스 장군은 1만 명의 기병과 함께 로마 군단을 공격했다. 크라수스는 아들 피블리우스를 특공대에 맡겼으나, 아들이 적의 화살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결국 크라수스는 퇴각 조건을 논의하자는 파르티아군의 유혹에 넘어가 협상장에 나갔다가 적에게 생포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의 군단은 약 1만 명만 간신히 살아남아 시리아 속주를 지켰지만, 더 이상의 진군은 포기해야 했다. 로마 최고의 부자이자 삼두체제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던 크라수스는 그의 생명도 구하지 못했다. 파르티아군은 그에게 끔찍한 최후를 안겼고, 뜨거운 금을 그의 시신에 부어 고통을 더했다. 이는 파르티아인들이 크라수스와 로마 문명에 대한 경멸을 드러낸 상징이었다.
크라수스는 군사적 업적을 통해 명성을 얻고자 시리아 총독으로 자원한 후, 파르티아에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전쟁 준비 동안 사욕을 채우기 위해 신전의 보물을 약탈하고, 군사들의 신뢰를 잃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파르티아의 귀족 수레나스의 사병들에게 참패하며 군대는 와해되었다. 생존한 병사들은 크라수스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고, 그가 협상장에 나가도록 압박했다. 결국 그는 함정에 빠져 살해당하게 되었고, 지나친 탐욕과 명예욕이 그의 비극적인 최후를 초래했다.
크라수스의 삶은 반면교사의 사례로 남았다. 그는 금력으로 권력을 얻으려 했지만, 전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의 권력 욕망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했고, 그는 재산을 모았으나 평판을 얻지 못했다. 남에게 베풀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야망만을 위해 재산을 사용한 결과, 그는 전쟁터에서 아들과 함께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다. 로마에서는 그를 동정하는 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