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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역사 32편 화폐의 발달 과정 서양 고대사10

by cellife 2024.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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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사10  아테네 제국 경제 약탈

기원전 477년 봄, 아테네를 중심으로 이오니아, 아이올리스, 그리고 에게해의 여러 섬에 위치한 폴리스들이 모여 동맹을 결성했다. 이 동맹은 페르시아의 재습격에 대비하기 위한 명분으로 만들어졌다.  델로스 동맹에는 약 150에서 330개의 폴리스 국가가 참여하였으며, 모든 폴리스는 평등한 투표권을 가지면서 공동의 해군을 구축하고 훈련하기 위해 일정한 기여를 해야 했다. 이 때문에 델로스 섬에서 의회 모임을 갖고 동맹 기금을 보관하였으며, 동맹의 이름도 이 섬에서 유래했다.

 

기원전 454년, 아테네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동맹은 아테네로 이전하게 되었고, 사실상 아테네 제국의 일원으로 변모했다. 아테네는 공금을 사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으며, 동맹 탈퇴를 원하는 폴리스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거나 자원과 식량을 강제로 요구하며 동맹국들 위에서 군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 동맹'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를 물리친 이후, 더 이상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오만해지고, 타국을 착취하는 '괴물'로 변모한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며 "세금을 내면 지켜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이는 사실상 동맹국들에게 아테네가 세금을 바치라는 요구와 다름없었고, 이러한 방식으로 가입한 폴리스는 265개에 달했다.

 

아테네의 재정 수입 중 40%가 델로스 동맹에서 나오고, 다른 폴리스에서 갈취한 전리품을 포함하면 전체 재정의 절반 이상이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었다. 이 자금을 통해 아테네는 신전을 건설하고 해군의 급여를 지급했으며,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에 익숙해지며,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가 다른 이들의 고통에서 비롯된 사실에 무감각해졌다.

 

이런 아테네의 독주에 반발한 폴리스도 존재했다. 섬나라 낙소스가 동맹 탈퇴를 선언하자, 아테네는 즉시 침공하여 첫 번째 식민지로 삼았다. 한때 그리스의 자유를 수호했던 아테네는 점차 괴물로 성장해 가고 있었고, 이에 전통의 강자 스파르타는 불안과 질투, 자존심의 상처로 인해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스 내전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60년 - 기원전 446년)

전통적으로 해군은 스파르타에, 육군은 아테네에 의해 지배된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아테네가 해군력을 강화하고 내륙국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항구와 직결되는 대규모 도로와 이를 보호할 성벽을 건설하려 했다. 이러한 아테네의 계획은 스파르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었고, 이는 두 국가 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의 동맹국인 코린토스와 중립국 케르퀴라 간의 작은 분쟁에서 시작되었다.  동맹국의 탈퇴와 반발국 간의 갈등 같은 작은 문제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아테네가 케르퀴라를 지원하자 스파르타 편의 코린토스는 반발하며 메가라 등 아테네에 불만을 가진 동맹국들을 자극했다. 결국 스파르타는 동맹국들과 함께 아테네 제국을 무너뜨리기로 결의하고, 아테네가 최후통첩을 거부하자 전쟁이 시작되었다.

 

포이 섬을 둘러싼 제2차 신성 전투와 델로스 동맹의 지원을 받은 아테네가 스파르타를 상대로 승리한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는 연이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승리는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종식시키는 30년 평화조약으로 이어졌으며, 이 조약은 아테네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기본적으로 동맹 간의 갈등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사실상 아테네의 에게해 지역에서의 독점권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이 평화조약은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근본적인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체결된 지 15년 만에 무너지게 되었다.

 

27년간 지속된 이 전쟁은 서로의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오지 못한 채 잔혹하고 폭력적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스 세계의 기존 질서와 힘의 균형이 붕괴되면서 도시국가들은 상상할 수 없는 폭력에 휘말렸고, 전쟁은 인적·물적 피해를 초래하며 그리스 문명의 근본적인 가치인 관습과 신앙까지 흔들어 놓았다.

 

그리스 패권 전쟁  의의 -  투퀴디데스 함정

역사에서 가정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만, 만약 아테네가 전성기처럼 에게해만을 지배하며 만족했다면, 전쟁 없이 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그리스 문명의 발전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은 단일 요인으로 발생하지 않으며, 여러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한다. 아테네의 급부상과 오만, 양측의 두려움과 이해관계,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의 무지와 권력욕이 결합하여 결국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아테네의 무모한 행동과 시칠리아 침략은 생존의 필요가 아니라 지배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전쟁의 근본 원인은 인간의 탐욕과 권력욕으로, 이는 이성이 통제하지 못할 때 발생하게 된다. 결국, 전쟁은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탐욕과 권력욕의 결과로,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결국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가 승리하였으나, 전쟁 후 동맹국들은 무너지고 경제는 파탄에 이른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승리했지만 그리스 전체의 맹주가 되지는 못했다. 이후 스파르타는 저항과 반란에 시달리다 기원전 371년 테베에게 패배하며 힘을 잃게 된다.

 

군국주의에 의존했던 스파르타는 재기할 수 없었고, 그리스는 335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된 후 로마의 속주가 되면서 독립과 영광을 잃게 된다. 그리스는 1830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까지 2,000여 년 동안 자주적으로 다시 뭉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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