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금융의 역사 31편 화폐의 발달 과정 서양 고대사9

by cellife 2024. 8. 5.
반응형

동 서양 전쟁 전쟁의 서막 서양 고대사9

페르시아 건국 

BC 671년에 아시리아는 오리엔트를 최초로 통일했으나, 통일 후 30년이 지나 BC 612년에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연합군에 의해 아슈르와 니네베 같은 주요 도시가 함락되면서 멸망하게 되었다. 아시리아 제국의 붕괴 이후,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게스 왕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삼각지대를 정복하려고 하였다. 이 시기에 신바빌로니아의 나보니두스 왕은 현재 이란 남부를 다스리던 아케메네스 왕가의 키루스와 동맹을 맺고 메디아에 대항하게 된다.

 

결국, 키루스 왕은 BC 550년에 메디아를 정복하고 페르시아 왕국을 세워 제국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이 시기는 서기 3세기 초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구분하기 위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로 불린다.

 

그 후 키루스는 리디아와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소아시아 해안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그리스 도시들도 차지했다. 그의 아들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정복하였고, 다리우스 1세(BC 552~BC 486년 재위) 시대에는 인더스 강에서 에게 해 북쪽의 트라케까지 지역을 정복하며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여 제국의 전성기를 누렸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제국으로 손꼽히는 페르시아는 다리우스 1세의 지휘 아래 설계되고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가 이룩한 업적은 제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에서 다리우스 1세는 그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로, 그의 통치 아래 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광대한 제국을 ‘관용’의 리더십으로 통치하며, 모든 백성이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다리우스 1세는 전제군주제로서도 이집트의 라몬 신, 유대인의 신 등 다양한 신앙을 인정하고, “내 제국에서 노예는 없다”라는 선언을 통해 인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다리우스 1세는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 체계를 강화하고, 제국을 3개의 속주로 나누어 왕이 임명한 태수가 각 속주를 통치하도록 했다. 각 속주에는 왕의 지시를 따르는 장군과 재무관이 배치되어 있었다. 아시리아의 방식을 본받아, 왕은 태수의 충성을 감시하기 위해 관리인을 파견하여 그들의 행동을 감독했다.또한, 왕과 지방 관리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왕의 길'이라는 주요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이 도로 중 가장 긴 구간은 리디아의 사르디스에서 페르세폴리스까지 이어져 2,600킬로미터에 달했다.

 

 

 

그리스 페르시안 전쟁의 서막

다리우스 1세는 소아시아의 그리스계 이오니아인들을 정복한 후, 이들을 페르시아의 총독이 직접 통치하도록 했다. 이는 과거 리디아가 이오니아인들에게 자치권을 허용했던 시절과는 크게 다른 상황이었고, 이오니아인들은 이에 반발하여 BC 499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시점에서 본국 그리스에서는 에레토리아와 아테네 시민들이 소규모 지원군을 파견하며 이오니아인들을 지원했다. 페르시아는 결국 반란을 진압하고 지배권을 재확립했지만, 그 과정은 몇 년이 소요되었다. BC 492년, 다리우스 1세는 반란을 영구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에게 해의 주요 섬들과 그리스 본토를 정복하는 대원정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는 페르시아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경제 이권을 둔 전쟁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BC 5세기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양대 세력의 필연적인 충돌이었다. 당시 해상 교역은 육상 교역보다 효율적이었고, 지역 간 생산물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최초의 상업 민족인 페니키아인은 뛰어난 항해술로 지중해를 누비며 식민 도시를 세웠고, BC 13세기에는 알파벳의 모태가 되는 문자를 발명했다. BC 814년, 페니키아의 티레에서 디도 공주가 카르타고를 세워 서지중해 무역을 주도하며 700년간 존속했다. 그리스 폴리스들은 BC 8세기부터 해양으로 진출했고, 같은 언어와 동질감을 바탕으로 대립하면서도 고대 올림픽에 참가할 정도로 연대감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토질이 부적합해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에 농업 식민지를 세우면서 카르타고와 충돌했다.

 

페르시아는 흑해, 이집트, 인도 서부까지의 교역망을 확보한 후 지중해 해양 패권을 노리게 되었고, 이는 그리스의 해상무역으로 축적된 부를 탐내기 위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전쟁은 고대사에서 중요한 경제활동으로, 힘이 질서였던 시대에 가장 수익성 높은 방법이었다.

 

정치 종교 목적인 전쟁

정치적, 종교적 이념으로 인해 발생한 전쟁이었다. 다리우스 왕이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폴리스를 군주 정치로 강요했을 때, 이 지역의 발전된 민주 정치 체제를 반대하며 이오니아 도시가들인 밀레토스는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스파르타는 응답하지 않았지만, 아테네와 에우보이아가 지원을 하여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페르시아의 막강한 군대에 대적하기에는 부족했다.

 

밀레토스의 반란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다리우스 왕은 그리스 도시들을 정복하기 위해 교묘한 외교 전략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490년, 그는 2만 5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아테네를 공략하기 위해 마라톤 평원에 상륙했다. 아테네는 처음에는 두려워했지만, 밀티아데스 장군의 지도 아래 1만 명의 병력을 소집하여 전략적으로 배치했다.

 

전투는 예상대로 진행되었고, 아테네군은 중앙에서의 돌파를 당하면서도 좌우에서 페르시아군을 협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마라톤 전투로 기록되었으며, 아테네군의 사상자는 192명에 비해 페르시아군의 손실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마라톤 전투에서 전사한 아테네군 병사 중 한 명이 소식을 전한 에피소드는 현대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를 탄생시켰다.

결론적으로, 페르시아 전쟁은 정치적 이념과 자유 쟁취의 상징적인 충돌로,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페르시아 제국 간의 복잡한 관계를 나타냈다. 이러한 전쟁은 그리스의 민주 정치 발전 및 동질감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국의 확장을 둔 전쟁

두 세계 간의 갈등의 1차적인 원인은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 욕구에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491년,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 주요 도시국가들에게 사자를 보내 '흙과 물'을 상징적인 공물로 바치라는 요구를 전달했다.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이 이 요구를 수용했으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대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페르시아 사절은 범죄자 처형 장소에서 살해당했고, 이에 분노한 다리우스 1세는 600척의 전함과 25,000명의 병력을 모아 진군했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가볍게 보았으나,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했다. 아테네의 장군들은 중장보병 9,000명을 이끌고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군을 선제 공격하여 그들의 진형을 무너뜨렸다. 결과적으로 페르시아는 6,400명의 병력을 잃고 퇴각했으며, 아테네의 손실은 192명에 불과했다.

 

아테네에서 페르시아 사절이 처형된 사건은 다리우스 1세의 분노를 유발하여, 그는 600척의 전함과 25,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진군했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과소평가했으나,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의 중장보병 9,000명에 의해 큰 패배를 당하고 6,400명의 병력을 잃었다. 반면 아테네는 단 192명의 손실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페르시아는 10배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20만 대군이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에게 저지당하며 패배했다. 페르시아군은 각지에서 강제로 동원된 다국적 병력으로 구성되어 긴 이동 거리와 보급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고, 그리스 연합은 애국심이 강한 자유민들로 구성되어 병력의 질이 높았다.

 

전투에서 그리스는 백병전 중심의 전술로 밀집 대형을 이루어 강력한 방어를 유지했다. 페르시아의 기마대 전술은 그리스의 복잡한 지형에서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페르시아가 유리했으나, 그리스는 아테네 근처의 은광 덕분에 자원을 신속히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가 준비한 200척의 전함이 없었다면 전투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페르시아의 1차 원정

 BC 492에 다리우스 왕은 그리스 북부의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공격한 후 아테네 정복을 위한 대규모 육해군 작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작전 초기, 300척의 함대가 아토스 곶에서 태풍으로 침몰하면서 1차 원정은 실패했다. 이에 분노한 다리우스는 아테네인을 잊지 않도록 노예에게 매 식사 때마다 외치게 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페르시아의 2차 원정

BC 490년, 페르시아는 에게 해를 건너 에레토리아와 아테네를 정벌하기 위해 2차 원정을 실시했다. 이 원정군은 2만 5천 명의 보병과 1천 명의 기병, 600척의 군함으로 구성되었고, 에게 해를 장악한 페르시아는 해전에서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적 함대를 공격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군의 상륙 소식에 놀라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지원은 11일 후에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아테네의 명장 밀티아데스는 시민들을 설득해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군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는 양익 포위 전술을 창안하고 유리한 지형을 활용해 병력을 배치했다.

 

결전에서 그리스군은 신속하게 전진하여 페르시아군의 사정거리 내로 들어가 최소한의 피해로 공격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아테네군은 192명의 손실을 입은 반면, 페르시아군은 6,400명의 큰 피해를 입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는 동서양 간의 최초의 대결로 기록되었다. 그리스군은 이후 빠르게 후퇴하여 아테네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페르시아의 3차 원정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배 후에도 계속 진행되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 재침공을 준비했으나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의 반란으로 인해 준비가 지연되었고, 기원전 485년 다리우스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아 그리스 원정을 준비했으며, BC 480년에는 30만 이상의 대군을 이끌고 직접 전쟁에 나섰다. 그러나 페르시아 군의 대규모 병력은 이동 속도가 느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30여 개 도시국가들이 동맹을 조직할 시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스파르타가 맡고,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가 작전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테르모필라이에서 스파르타 왕 레오디나스가 페르시아 육군을 저지하는 동안, 아테네 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격퇴하는 계획을 세웠다. 페르시아 군은 4일간 정찰 후 공격을 시작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반역자 덕분에 페르시아 군은 뒤쪽으로 우회하여 공격, 스파르타 왕과 병사들은 모두 전사했다.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를 점령했지만 시민들은 이미 대피한 상태였다. 한편,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해군을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스 함대는 페르시아 함선을 공격하며 큰 피해를 입혔고, 강한 폭풍으로 페르시아 함대의 4분의 3이 침몰했다. 크세르크세스는 그해 겨울 페르시아로 돌아갔지만 군대는 여전히 그리스에 남아 있었다.

페르시아 전쟁은 플라타이아이 전투와 미칼레 전투로 종결되었으나,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은 이오니아의 폴리스를 해방하기 위한 공격을 계속했다. 결국 BC 448년경, 아테네와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사이에 전쟁 종결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리스 페르시안 전쟁의 결과

그리스인들은 이 전쟁을 “노예제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로 인식했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자부심을 한없이 키워주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을 통해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델로스 동맹의 힘이 커짐에 따라 아테네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는 그리스 세력들이 나타났고, 이로 인해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게 되었다.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나뉘어 갈등하던 끝에 두 나라는 30년 전쟁(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렀고,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굴복시켰으나 긴 전쟁은 두 나라를 모두 쇠락의 길로 이끌었다. 그때 북부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일어나 발칸반도를 휩쓸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마침내 숙적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인도 북부에까지 힘을 떨쳤다. 그의 정복전쟁은 동서 교류의 물꼬를 튼 사건으로 기록됐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