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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역사 30편 화폐의 발달 과정 서양 고대사8

by cellife 2024.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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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역사 30편  고대 그리스 문명이야기   서양 고대사8

 

그리스 문화는 인간의 가치와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리스인들의 태도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합리주의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서양 전통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특히 문학과 철학 분야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문학에서는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서양 문학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리스인은 또한 많은 유명한 역사학자들을 배출하였다.

 

고대 그리스는 현대 지식의 기초가 되는 학문적 업적을 이룩한 시기이다. 이때 물리학, 기하학, 수학, 민주주의, 의약, 드라마, 코미디 등 현대 사회의 중요한 분야들이 시작되었다. 또한, 이 짧은 시기에 많은 대가들이 등장하여 그들의 성취가 오늘날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대 그리스는 후에 로마에 의해 계승되고 발전하여 서양 문화의 근본이 되었으며, 비잔틴 제국을 통해 슬라브 문화와 이슬람 고전기로 이어졌고, 결국 서양 르네상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의 영향을 받은 신고전주의 양식은 18세기와 19세기 유럽과 미국에서도 나타났다.

 

 

기원전 800년경 그리스에서 폴리스가 등장하였다. 폴리스는 성벽을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도시들로, 일반적으로 도시 국가로 번역되지만, 기능적으로는 공동체 국가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리스는 산악 지형과 복잡한 해안선으로 인해 지역 간의 교류가 어려운 환경이었다.

 

기원전 800년경 그리스에서 폴리스가 등장하였다. 폴리스는 성벽을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도시들로, 일반적으로 도시 국가로 번역되지만, 기능적으로는 공동체 국가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리스는 산악 지형과 복잡한 해안선으로 인해 지역 간의 교류가 어려운 환경이었다.

 

폴리스의 형성은 암흑기의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재산과 토지를 보호하려는 군사적 공동체에서 시작되었다. 이 군사적 요새가 발전하면서, 주변 주민들의 정치, 종교, 상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는 인근 지역을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하게 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것이 바로 폴리스라는 국가이다. 폴리스는 소규모 국가로, 총 수는 적어도 500개 이상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폴리스는 면적이 제주도의 1/3에도 미치지 못하며, 시민 수가 5천 명을 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비록 규모가 작지만, 각 폴리스는 독립적으로 의사결정과 정책 집행을 할 수 있는 자치적인 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국가는 중세 유럽 도시와는 달리, 성벽이 방어 목적만을 가지고 있었고, 시민들은 동일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시민권을 공유했습니다. 직접 민주정치 체제를 기반으로 한 민회의 존재는 폴리스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지리적,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양한 규모와 형태를 가졌으며, 아테네의 민주적 조직은 다른 폴리스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에 들어서면서 폴리스는 내부의 갈등과 외부의 침입으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마케도니아에 의해 정복되면서 정치적 실권은 부유층에게 집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폴리스는 자치적 활동을 계속하였고, 헬레니즘 시대의 문화적 기반은 이러한 폴리스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대 아테네

아테네는 원래 견고한 암석 위에 세워져 외부의 방어를 위해 모여 살던 지역이었다. 이동기의 혼란이 끝난 후, 주민들은 토지로 내려가 외곽에 성벽을 세우고 생활공간을 확장하였다. 아크로폴리스를 중심으로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신전들이 세워져 있으며,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살았다. 아테네 사람들은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네를 그들의 폴리스를 지켜주는 신으로 여겼고, 그래서 아크로폴리스 중앙에 파르테논 신전을 건축했다.

 

미케네 문명이 몰락한 후 그리스 암흑기에도 아테네는 도시가 붕괴하지 않고 유지되어, 고대 아테네인들은 이를 자부심으로 여겼다. 기원전 7세기경 아테네에서는 왕정이 시행되었으나, 왕의 권한이 거의 없고 9명의 아르콘이 통치하는 귀족정으로 변모했다. 관습법 체제는 귀족들에게 유리하게 운영되었고, 이에 불만을 품은 민중은 정치개혁을 요구했다.

 

아테네 사회는 스파르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개방적이었으며, 귀족, 시민, 거류외인(메틱), 노예로 구성되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18세 이상 남성 시민들이 모여 정부의 수장과 전쟁 참전 여부 등을 결정하는 형태였으며, 여성과 노예, 비시민은 제외되었다. 이는 사실상 남성들만의 투표로 요약될 수 있다.  귀족은 유파트리데와 지오모리로 나뉘며, 시민은 펜타코시오메딤노이, 히페스, 제우기테 등으로 구분되었다. 시민은 정치에 참여하고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으며, 부모 중 한쪽이 아테네 시민이면 시민권을 인정받았다.

 

아테네의 두 가지 주요 특징은 교역과 민주주의이다. 아테네는 척박한 땅 때문에 농업에 의존하기 어려웠고, 이로 인해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과의 교역 중심으로 성장했다. 또한, 아테네는 왕정제에서 민주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두 번의 주요 변화를 겪었습니다. 첫 번째는 기원전 621년 드라코의 성문법으로, 이는 가혹한 법률로 인해 곧 대체되었다. 그 이후 솔론이 개혁을 단행하여 부의 분배와 빚 탕감, 시민의 정치 참여를 유도했다.

 

 

아테네 경제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고고학적 조사 결과, 채굴권이 새겨진 여러 돌기둥이 발견되었다. 2004년 폴레테리온 청사를 발굴하면서 400개의 은화가 발견되었고, 돌기둥에는 복잡한 금융계약의 내용이 드러났다. 대여 대상은 미탐사지, 개발지, 과거 유휴지로 크게 세 가지로 나뉘며, 아테네의 투자자들은 채굴권과 광산 운영에 필요한 노예 및 장비를 임차할 때 조합을 결성했다.

 

아테네는 곡식 교역을 위해 흑해로 향하는 항해가 위험했으며, 갤리선을 채우기 위한 비용이 상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지원 없이 항해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이익률 20~30%를 목표로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많은 돈을 투자하도록 유도한 금융 제도는 아테네 경제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아테네 정부는 재산권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할당하여 위험한 탐사 및 채굴 사업에 투자자를 끌어들였고, 이러한 분산투자는 도시의 복잡한 경제를 뒷받침했다.

 

아테네가 부엉이 은화를 주조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 후반으로, 4드라크마짜리 부엉이 은화는 약 1억 2천만 개가 주조되어 역사상 가장 많이 발행된 동전 중 하나다.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발행된 이 동전은 가장 오랫동안 사용된 동전 중 하나로 꼽힌다.

 

아테네의 광대한 교역망은 금융 없이는 운영될 수 없었다. 상인들은 자본과 무역 중개자, 위험 대비 보험이 필요했다. 로마 제국은 정복을 통해 확장했지만, 이 과정에서도 금융이 중요했다. 군대가 여러 대륙으로 이동하고 주둔하기 위해서는 급여와 보급이 필요했고, 로마는 자체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화폐 경제를 발전시켜야 했다. 각 지역을 정복한 후에는 세금을 징수하고 통치해야 했고, 이를 위해 세금징수, 군대 보급, 건설 등의 다양한 기능을 민영화했다.

 

고대 스파르타

스파르타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암흑시대에 시작된다. 기원전 12세기경, 도리아인들이 아카이아인들이 살던 지역을 침략하여 그들의 문명을 파괴했다. 이로 인해 기원전 8세기까지 그리스 전역은 역사적 기록이 없는 암흑시대에 접어들었고, 도리아인들 중 일부가 펠로폰네소스반도에 정착하여 스파르타라는 도시를 세우게 되었다. 

 

페넬로폰네스반도의 비옥한 지역에 자리 잡은 폴리스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다른 폴리스와의 교류가 늦어졌습니다. 이들이 바로 스파르타인의 조상이다.

 

 스파르타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계급제도였다. 스파르타인은 자유로운 시민 계급으로, 헤일로타이는 도시의 하층민으로 제한된 자유를 가지고 있었으며, 개인 노예가 존재했다. 각 계급은 맡은 역할과 대우가 달라 사회 구조를 형성했다.

 

전쟁과 육체적 건강은 스파르타 사회에서 핵심적인 가치로 여겨졌다. 스파르타는 상설 군대를 보유한 유일한 폴리스로, 전쟁의 공로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결정했다. 남자아이들은 7세부터 아고게라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 합숙하며 전쟁 기술과 사회성을 배웠고, 20세가 되면 정식 군인으로 승격되어 평생 군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았다.

 

스파르타인(Spartiates)의 주요 직업은 군인이었으며, 이들만이 참정권을 가졌다. 두 번째 계급인 페리오이코이(Períoikoi)는 도리아인도, 아카이아인도 아닌 상공업에 종사하는 자유민으로, 정복자 도리아인과 함께 이주하여 정착한 다른 지역 출신의 그리스인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시민권이 없어 참정권과 선거권이 없었지만, 병역 의무는 부여받았다.

 

고대 국가에서 병역에 종사하는 것이 시민권을 인정받는 기준이었지만, 스파르타의 페리오이코이들은 일개 병졸로 병역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인인 스파르타인과 권리가 달랐다. 스파르타의 최하층 계급인 헬로트(Helot)는 도리아인 침략 이전에 스파르타에 살던 선주민으로, 노예는 아니었지만 농노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다.

 

헬로트는 결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으나, 참정권이나 사유재산권, 재판권 등을 인정받지 못했고, 병역 의무도 없었다. 이들은 스파르타인이 소유한 농장에서 일하는 것이 유일한 직업이었다. 스파르타인, 페리오이코이, 헬로트의 인구 비율은 약 1대 7대 16으로, 스파르타인은 소수의 인구로 나머지를 지배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스파르타인이 군무에만 전념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성인 남성이 군무에 종사할 수 있는 나이인 20세부터 60세까지의 스파르타인은 대개 수천 명에 불과하며, 만 명에 이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스파르타인도 30세가 되어야 민회에 참석해 투표할 수 있었다. 이는 소수 정예주의의 결과로, 스파르타의 군사력 강화를 위한 필요에 의해 억압적인 사회 구조가 형성되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스파르타는 두 명의 왕과 30명의 장로들로 구성된 장로협회에 의해 통치되었다. 왕권은 유지되었지만,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두 왕제를 채택하였으며, 평시에는 장로협회가 도시 운영을 담당했다.

 

스파르타는 두 명의 왕이 통치하는 디아르키아 체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이는 모나르키아와는 구별됩니다. BC 7세기 후반, "리쿠르고스의 개혁"을 통해 이 정치 체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스파르타의 성격이 급진적으로 변화했다. 아테네의 솔론의 개혁이 그 도시의 성격을 정립한 것과 마찬가지로, 리쿠르고스의 개혁은 스파르타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개혁으로 스파르타인의 일상은 군무를 최우선으로 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성공적인 개혁은 민족의 방향성을 정립하는 동시에, 실패할 경우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스파르타 경제

스파르타의 완전한 시민들은 헤일로타이가 경작하는 농지를 할당받아 경제 활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토지가 대지주에게 넘어갔고, 시민 수는 급격히 감소했다.  스파르타는 초기부터 검소한 평등사회를 지향하며, 스파르타인들은 절제된 식사를 하며 생활했다.  전설적인 입법자 뤼쿠르고스는 기원전 7세기경 부의 축적과 사치를 없애기 위해 화폐 사용을 금지했다. 아테네와 달리 스파르타는 상업활동을 제한하고 사적 재산 소유를 극도로 제한하여 진정한 검소함을 추구했다. 이러한 가치관은 지배층의 근검과 절약을 미덕으로 삼는 문화로 이어졌으며, 상호 감시가 구축되었다. 기원전 5세기 초에는 10,000명이었던 스파르타 시민이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1,000명 이하로 줄어들었고, 기원전 244년에는 700명에 불과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신자와 만혼자를 처벌하는 법이 제정되었지만, 시민 감소를 회복하는 데에는 효과가 없었다.

 

스파르타인들은 공동체 생활을 중시하며,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함께 식사하고 훈련했다. 개인의 자유와 사적 재산 소유는 극도로 제한되었고,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대신 군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20세까지는 공동 교육과 훈련을 받고, 이후 40년간 공동 식사 및 생활을 하며 '페이디티아'라는 식사 공동체에서 집단생활을 했다.

 

이러한 공동체는 '멜라스 초모스'라는 검은 수프로 끼니를 해결하며 강한 공동체 의식을 형성했다. 스파르타인은 사생활을 원하지 않으며, 공공의 일원으로서 애국심 속에서 자신을 잃도록 교육받았다.

 

추후에 스파르타의 헤일로타이 계급은 일반적으로 '노예 계층'으로 묘사되지만, 사실상 이들은 '피정복민'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메세니아를 정복하고, 그 주민들을 '국가의 노예'로 삼았다. 이를 통해 스파르타는 농업 경제력을 확보하고 내부적으로 상대적으로 평등한 생활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제국들이 등장하고 사라졌지만, 스파르타처럼 경제의 대부분을 단일 식민지에 의존했던 사례는 유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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