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역사 27편 서양 고대사5 로마의 제도 체제
기원전 1세기 로마는 세 차례의 내전(마리우스-술라 내전, 카이사르 내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을 경험했다. 이 시기에 혁명 세력이 토지 재분배를 통해 사회계층의 이동을 촉진했으며, 과거의 지주들이 무산대중으로 전락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많은 이탈리아 시민들은 동방의 악화된 생활 여건 때문에 로마 이민자들에게 위협을 느끼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 서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로마 사회는 원로원 계층이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며, 사업가와 지주들이 도시와 지방의 상층 구조를 형성했다. 노동자 계급은 도시의 소매상, 기술공, 중산층의 사무실 및 작업장 노예, 시골의 자유농업인, 대농장의 노예와 소작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로마의 농업은 동방과 유사했으며, 제조업은 느리게 성장했지만 비교적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금융과 은행업무는 이윤을 창출하며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로마에서 밀은 곡물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서양 역사에서도 그 중요성은 변하지 않았다. 밀의 부족은 큰 문제로 여겨졌고, 로마는 시칠리아와 이집트 등에서 밀을 구매하여 시민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농업의 중요성이 크게 중요하게 된다.
로마 농업경제
로마는 실용적인 기술이 발달한 나라로, 특히 밀의 도정 과정이 기술 발전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밀은 껍질을 쉽게 분리할 수 없고, 가루를 내기 위해서는 통째로 부서뜨려야 하므로 복잡한 도정 과정이 필요하다. 이로 인해 밀가루의 품질은 도정 방법에 따라 크게 달라지며, 대규모 제분 공장이 필수적이었다.
제조업에서 수력이나 동물의 힘을 이용한 기계 장치가 필요했고, 껍질과 가루를 분리하기 위해 다양한 도구가 사용되어야 했다. 로마의 기술 발전은 이러한 밀의 도정과 제분 과정 덕분에 촉진되었으며, 물을 사용하는 수로 건설과 도로 건설, 전쟁 등 여러 요인과 함께 밀을 주식으로 삼은 것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제조업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현재 쌀의 도정은 소규모로 가능하지만, 밀은 대규모 제분 공장이 필요하다. 밀가루는 강력분, 중력분, 박력분으로 나뉘며, 이는 글루텐 함량에 따라 결정된다. 용도에 맞는 밀가루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가공 공정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큰 규모의 공장이 요구된다.
M. 로스토브제프는 로마 제국의 경제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농업은 대부분의 주에서 핵심 역할을 하며, 둘째, 포도와 올리브 재배가 농업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다. 셋째, 정치권력과 연결된 대지주가 농업을 운영하며, 독립적인 소지주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농촌 인구는 로마 제국에서 중요한 노동자 계층을 형성한다. 로마의 상공업이 농업에 비해 미약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노예 노동의 존재로 인해 기계 발명이 이루어지지 않아 공장을 건설할 수 없었다. 둘째, 진정한 경쟁의 부족이 산업 발전을 저해하며, 이는 소비자의 특성과 구매력에 달려 있다. 결국, 로마는 자본 집약적인 산업을 개발할 여력이 없었다.
로마 농업의 약탈 경제
일반적인 국가에서는 자원이 부족할 경우 단순한 약탈을 통해 국가의 유지 또는 번영을 선택하고 고대시대에는 대표적으로 바이킹이 있으나 로마 공화정은 달랐다. 라티푼디움 제도가 유지된 이유는 정복전쟁으로 생긴 노예들이 노동력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제한된 수의 노예를 이용한 집약적 생산 방식은 중소규모 농장인 빌라에 특히 적합하며, 포도와 올리브와 같은 작물 재배에 효과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대카토와 콜루멜라 같은 농업 서술가들은 빌라 소유주의 시각에서 그들의 작업을 기록하였다.
한편, 소작인에게 분할지를 임대하는 방식은 공화정 말기와 제정 초기부터 확산되었다. 이는 많은 이탈리아 자유 농민들이 라티푼디움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되고, 토지가 부족한 상태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농민들은 노예들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일꾼으로 여겨졌고, 그 결과 소작농에게 토지를 임대하여 농사짓게 하는 제도가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와 제정 초기에 로마제국의 팽창이 멈추면서 노예 공급이 급격히 감소했다. 기원전 2세기와 1세기에는 노예 착취로 인해 대규모 노예 반란이 발생했으며, 특히 스파르타쿠스 반란은 대농장의 노예와 하층민들이 합세하여 규모가 커졌다. 이로 인해 로마의 부자들은 노동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대한 두 가지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공화정 후기부터 제정기로 넘어가면서, 자영농민들이 토지 소유에서 분리되면서 자유 소작관계가 보편화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팍스 로마나 성립으로 제정 초기의 정복전쟁이 중단되자, 예속된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고, 노예시장에서 전쟁포로를 정기적으로 공급받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동시에, 노예 노동을 기반으로 한 농업 경영의 수익성도 지속적으로 하락하였다. 이러한 환경 변화로 인해 2세기 후반부터 대다수의 대토지 소유자들이 소작 경영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고, 노예 노동에 의존한 대농장 경영 방식은 전반적으로 침체기에 들어섰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로마 시민들이 농사를 짓지 않고 놀기만 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소작농이나 자영농으로 활동하며 일을 했고, 대농장들은 대부분 속주민과 시민권자 소작농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이들이 지불하는 세금은 대토지 소유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서기 3세기에 접어들면서 로마제국의 토지 제도는 큰 변화를 겪었다. 3세기 위기가 시작되며 로마제국은 내란, 외침, 전쟁, 기근, 질병 등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이로 인해 농업 시스템은 초기의 대농장제도, 소작제도, 자영농제도에서 예속 소작제로 변화하였다. 제정 초기 소작농들은 지주에게 예속되지 않았으나, 3세기 들어 자유 소작 관계가 소작농이 지주에게 예속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는 전쟁과 자연재해로 자영농들이 몰락하고, 지대를 제때 지불하지 못한 농민들이 지주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었던 데 기인한다. 국가 차원에서도 농민들의 예속을 장려하였고, 33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예속된 농민들이 토지를 떠날 수 없다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로마의 농업 경제에 관련한 결론
로마제국의 농업 시스템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초기 공화정에서는 자영농 위주였으나, 공화정 후기에는 노예를 이용한 라티푼디움이 확산되었고, 공화정 말기와 제정 초기에는 자유 소작제와 자영농, 노예를 이용한 대농장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제정 후기에는 예속 소작제로 변화하였다.
마지막으로, 일부 주장은 로마 시민들이 무위도식하며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 로마의 부유한 고위 원로원 의원들은 재산을 사치에만 쓰지 않았고, 공공건물 건설과 자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로마 시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노동에 종사하였으며, 정기적으로 곡물이 공급되는 도시는 로마 뿐이었다. 시민권자들은 세금과 상속세를 지불해야 했고, 이러한 요소들은 로마 시민들이 단순히 기생충처럼 살아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고대 로마의 경제적 기초 위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중세에 이르러 더욱 발전했다. 로마는 농업 중심의 경제 체계를 통해 생산성을 높였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중세의 중농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중농주의는 단순한 농업 중심주의가 아니라, 그 시대의 경제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결국, 중농주의는 농업과 경제의 상관관계를 재조명하고, 이를 통해 프랑스 역사에서 경제의 탄생을 이끌었던 중요한 사상으로 평가이다. 중농주의에 대한 면밀한 고찰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당시 경제 활동의 주체와 생산 과정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가능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