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역사 26편 서양 고대사4 로마 경제
고대 로마의 포럼 쿠페디니스는 다양한 상품을 거래하던 시장이었습니다. 가축, 포도주, 생선, 허브, 채소 등 특정 품목에 특화된 대형 시장이 최소 네 곳 이상 존재했지만, 로마의 포럼이 대규모 유통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팀가드와 같은 신도시는 상업과 수송을 촉진하기 위해 직교 구조의 그리드 플랜에 따라 설계되었다. 이러한 도시들은 뛰어난 도로망으로 서로 연결되었으며, 항해 가능한 강과 일부 수로도 널리 활용되었다.
기원전 2세기 동안 로마는 여러 정복전쟁을 통해 축적된 자본이 정치 권력의 중심인 원로원과 지방정부의 지배계급에 집중되었고, 정복된 지역에서 돈, 노예 및 기타 자원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어 로마 경제를 활성화했다. 정부는 새로운 자본가들에게 이탈리아 반도에서 경작 또는 목축을 위한 토지를 매입하도록 장려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식민지 도시로의 이민 증가로 인해 농업에 종사하는 이탈리아 시민의 수는 감소했고, 황무지에 정착할 농민도 부족했다. 대신, 대규모 노예 집단이 존재하여 원로원은 일부 자본가들이 노예를 활용해 대형 농장을 운영하도록 허용했다. 다른 자본가들은 제조업에 투자하여 공장을 세우고 노예를 고용했다. 동방 식민지에서 유입된 자본과 노동력이 농업과 공업에 투자되었고, 주요 농공상품은 고울, 스페인, 아프리카, 독일, 다뉴브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로마 세금
로마의 행정관은 시민들이 무보수로 맡았으며, 행정 경비는 주로 수출입 관세와 노예세로 충당되었다. 노예의 매매 시에는 2%에서 5%의 매각세가 부과되었고, 자유를 얻을 때에도 5%의 세금이 발생하여 행정 비용을 줄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시민들이 1년 동안 무보수로 군복무를 해야 했으며, 각자 무기를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이 의무는 점차 사라졌고, 국가 재정을 통해 병사를 고용하고 무기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때 ‘전쟁세’가 도입되었으며, 사치품에는 최대 10배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오거스투스는 세입 개혁의 일환으로 인구조사를 통해 각 주에 고정된 세분을 할당했다. 로마와 이탈리아 시민들은 간접세를 납부하고, 각 주에서는 직접세를 부과받았다. 또한 사설 세금 징수제를 폐지하고 국가가 직접 세금을 징수하게 했다. 옥타비안이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얻은 대규모 토지에서 발생하는 임대료는 매년 징수되었고, 이는 로마 황제의 개인 재산으로 간주되어 오거스투스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부유한 시민들은 전쟁 동안 국가에 융자를 제공해야 했고, 로마군이 전투에서 승리하면 전리품에 따라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다. 기원전 150년경에는 식민지에서 세금을 징수할 수 있게 되어 전쟁세가 폐지되었다. 정복한 지역은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고 현지 주민들에게 임대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방식으로 재원을 확보했다.
스페인에서 유입된 금과 은은 로마 재정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기원전 206년부터 197년까지의 10년 동안 스페인 광산에서 약 1.8톤의 금과 60톤의 은이 로마에 헌납되었다. 이러한 자원 덕분에 로마는 화폐 제도를 정비하고, 대량의 금, 은, 동을 확보하여 세금 없이도 재원을 조달할 수 있었다. 데나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주요 화폐로 자리 잡아, 용병의 월급 지급에도 사용되었다.
로마는 정복지에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총독과 강력한 군대를 배치하여 식민지 통치를 강화했다. 그러나 로마는 정복지에서 기존에 징수하던 세금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유연한 정책을 펼쳤고, 이로 인해 넓은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화정 말기에 이르러 로마 시민들의 세금 요구가 증가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130년경부터 로마는 속주에 대해 ‘수확세’를 부과하게 되었고, 이 세금은 징세 청부인에게 위탁되어 징수되었다. 징세 청부인은 사전에 5년치 세금을 로마 정부에 지급하고 징세 권한을 확보했으며, 이는 정부의 단기 수익을 증가시켰지만 장기적으로는 수입 감소로 이어졌다.
징세 청부인들은 자금력을 필요로 하여 서로 결탁해 회사 형태로 조직되었고,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로마 정부에 큰 징세권 대금을 지불했기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려 했고, 속주 주민들은 징세 청부 회사와 현지 징세 청부인 모두에게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이로 인해 세 부담이 급증했고, 결국 반란이 발생했다.
기원전 88년, 터키의 미트리다테스 대왕이 주도한 반란으로 그리스 도시들이 봉기했다. 징세 청부인 8만 명과 로마 상인 2만 명이 하루 만에 살해되었고, 미트리다테스는 독립을 요구하기보다는 징세 청부인을 폐지하고 봉기 도시의 세금을 5년간 면제할 것을 요구했다. 이 반란은 로마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로마 정부는 큰 타격을 입었고, 이 사건은 결국 로마 공화정의 혼란을 야기해 제정 시대로의 이행을 초래하게 되었다.
로마 상업 무역
로마는 왕정 시절부터 테베레강을 이용한 정기적인 무역 활동을 해왔습니다. 포에니 전쟁이 지중해의 상업 구조를 변화시키기 전까지 로마는 카르타고와 중요한 상업적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공화정 시기에는 단순한 소매 무역 외에도 주요 경쟁 도시들과 상업 및 정치적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로마 제국은 실크 로드를 통해 파르티아 및 다른 중개국들과 연결되어 중국과의 교역을 진행했다.
로마의 원양 항해용 상업선은 그리스 배에 비해 큰 혁신은 없었지만, 보호를 위한 선체의 납 씌움이 보편화되었다. 로마인들은 원형 선체 항해선을 사용했으며, 지중해의 안정적인 치안 덕분에 육상 무역은 주로 짐을 실은 노새에 의존했다. 로마 해군의 리부르와 갤리선, 트리레메가 없었다면 상업용 선박들은 해적에게 쉽게 공격당했을 것이다. 곡물과 건설 자재와 같은 대량의 저가 상품들은 해상 교역로를 통해 운송되었으며, 해상 수송이 육상보다 비용이 여섯 배 저렴했다. 빵을 만드는 곡류와 문서 제작을 위한 파피루스 같은 주요 상품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에서 이탈리아로 지속적으로 수출되었다.
고대 로마는 중국 한나라에 로마 사절단을 보내 비단을 구하기 위해 2년 동안 1만2000㎞를 달려 중국 낙양에 도착했다. 당시 로마는 현재 가치로 약 22억 달러에 해당하는 비단을 수입했으며, 한나라는 중화사상과 중화제국을 형성하여 동아시아 문화의 기초를 다졌다. 중국 한나라와 로마 제국 간의 교류가 시작된 이후 약 450년 동안 고대 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예수가 탄생할 무렵, 두 제국은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제국의 경제적 측면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로마인들은 사업가로서 상업 무역을 통해 제국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이론적으로 원로원 의원들과 그 후손들은 무역에 제한을 받았지만, 기사 계급은 상위 계층으로서 무역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반면, 플레브스와 해방된 노예들은 상점과 가판대를 운영하며 상업 활동에 종사했고, 많은 노예들은 중노동을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노예들은 고대 로마의 상업에서 중요한 거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로마 사회는 노예의 비율이 높고, 도망자 및 노예전쟁 등 다양한 요소가 얽혀 있어 상업에 독특한 특징을 부여했습니다. 로마의 무역은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로마인들은 카운팅 보드와 로마식 주판을 사용하여 화폐를 계산하고 단위를 기록했습니다. 로마식 주판은 로마 숫자 체계에 최적화되어 상업 활동에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로마 회계
고대 로마에서는 회계장부가 체계적으로 기록되었으며, 노예들이 라티푼디움의 금전 출납을 꼼꼼히 관리했다. 그들은 주인의 자산과 부채를 차변과 대변으로 구분하여 기록했으며, 이러한 관행은 현대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로마 제국 시절의 경제활동은 대부분 1년 안에 끝났기 때문에, 예산과 결산도 1년 단위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1년도 긴 기간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 초기 정부는 전쟁이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해 매월 ‘사변 예산’을 편성했고, 첫 해에만 추경 예산을 일곱 번이나 짰다.
반면, 보험 회사와 같이 수십 년짜리 계약을 다루는 경우 1년 단위 회계가 적합하지 않아 국제 회계 기준(IFRS 17)을 적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보험 계약의 많은 가정으로 인해 회계가 숫자 놀음에 가까워졌다는 비판이 있다. 로마의 1년 단위 회계 관행은 장기적인 경제활동을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복잡한 경제 현실을 반영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로마 화폐
전성기 로마제국은 이런 재정을 영토 확장과 그곳에서 징수한 세금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확장은 한계에 이르고 황제들은 재 원을 확보하기 힘들어졌다. 이때 황제들은 임시방편으로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을 한다. 당시 거래되고 있던 것이다.
화폐인 은화 `데나리온`의 은 함량은 줄이고, 더 많은 화폐를 발행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화폐 가치는 하락 하고 물가는 급격히 상승했다. 화폐 가치가 하락해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당시 유통되던 동전은 화폐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로마의 화폐 경제 시스템은 쇠퇴했고, 생산성은 급격히 하락했다.
1세기 로마제국 화폐에 포함된 은의 함유량은 90% 이상이었으나 이후 점차 감소해 200년 후인 3세기에 들어서면 4% 수준으로 감소한다. 당시 로마제국은 공공 건축물을 건설하고 은퇴한 군인들의 연금을 지급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순도가 낮은 화폐 발행으로 충당한 것이다. 황제들은 동전에 은 함량을 줄이는 눈속임으로 전보다 최대 20배 넘는 수량의 화폐를 더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근시안적인 황제들은 이 같은 방법으로 자신이 전보다 더 부자가 되었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들의 무분별한 통화 발행은 치명적인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당시 동전에 포함된 은의 함량이 최저 수준으로 감소한 3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세금을 화폐가 아닌 현물로 납부하도록 조세 제도를 개편했다. 이는 황제가 자신이 발행한 화폐의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된 행동이고, 사실상 로마 경제는 더 이상 화폐 경제가 몰락에 이르게 된다.
전성기 로마 제국의 은화는 순도가 거의 100%에 가까웠으나, 제국의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재정 적자가 심화되면서 주화를 대량으로 찍어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은의 순도를 낮추는 방식이 사용되었고, 네로 황제 시절에는 89%, 카라칼라 황제 시절에는 50% 이하로 떨어졌다. 화폐의 신뢰도가 하락하자 물가는 급등했고, 민심을 잃은 로마 제국은 결국 몰락하게 되었다. 이는 금융이 문명에 미치는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고대 로마가 금융 붕괴후 멸망 까지 갔던 원인
자급자족 경제에서는 현물 거래가 주를 이루어 금화나 은화와 같은 화폐의 유통이 거의 없었고, 군인들의 급료도 생필품이나 곡물, 가축으로 지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물 지급조차 어려워지자, 군인들을 국내로 불러들여야 했다. 로마 제국의 쇠퇴는 이렇게 시작되었으며, 4세기 중반부터 외부의 압력이 심화되면서 제국은 결국 패망하게 되었다. 로마의 번영과 멸망은 팽창주의 정책에 기인했으며, 특히 중국과의 대규모 무역적자가 비단수입으로 이어져 화폐 경제의 붕괴를 초래한 것이었다. 이처럼 시장 경제의 파탄이 제국의 몰락을 불러온 것이다.
황제들의 방만한 통화정책과 포퓰리즘을 기반으로 한 재정정책은 로마 전체의 생산성을 감소시켰다. 장기간 황제가 제공하는 빵과 서커스에 심취한 로마의 중산층은 생산적인 활동보다 정부가 제공하는 경제적지원에 더 의존하고, 남는 시간을 소비적인 향락을 즐기는 데 사용한다. 이는 결국 로마의 실물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