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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역사 25편 화폐의 발달 과정 서양 고대사3

by cellife 2024.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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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역사 25편 서양 고대사3  메소포타미와 로마의 발전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도자들은 국가의 자산을 추적하고 정치를 관리하기 해왔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곡물, 금, 은 등을 금속 화폐로 사용하였고, 이는 초기 상업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후 로마는 은화와 금화를 도입하여 통일된 화폐 체계를 구축하였으며, 이는 상업의 효율성을 크게 향상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상업 계약 제도를 발전시켜 로마는 관련 법률을 체계화했다. 이러한 법률은 상업 거래의 법적 기반을 마련하여 신뢰성을 높이고 분쟁 해결을 용이하게 했다. 더불어,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무역로는 로마 제국의 영토 확장 정책을 통해 상업적 중심지와 연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역이 더욱 활발해졌고, 다양한 상품의 유통이 촉진되었다. 두 문명 모두에서 경제와 금융 시스템의 발전을 이끌어냈다.

 

고대 로마 제국

로마(Roma)는 이탈리아 중부, 테베레강 연안에 위치한 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고대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다. 현재도 유서 깊은 역사 유적지로 유명하며, 세계문화유산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다. 로마 제국은 기원전 27년에 로마 공화국의 후신으로 등장하여 1453년까지 지속된 고대 로마의 정치 체제를 포괄한다. 총 기간으로는 약 1,200년 정도에 해당한다. 로마 제국은 기원전 753년에 세워졌으며, 서로마 제국은 476년까지 존재했다. 이를 계산하면 로마 제국은 총 1,229년간 지속된 셈입니다.  이 제국은 지중해 전역을 빠르게 정복하며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고, 로망스어군, 로마자, 키릴 문자, 로마법 대전 등 로마 제국은 고대 그리스와 함께 유럽 문명의 기초를 세운 것으로 평가받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서쪽에 위치하며, 바다와는 테베레강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7개의 언덕으로 구성된 지형에서 포로 로마노가 중심지로, 귀족들과 로마 황제가 살던 팔라티노 황궁,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전설이 있는 카피톨리노 언덕이 있다. 로마의 야경은 매우 아름다우며, 언덕은 경사가 완만해 쉽게 정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수도로서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이 도시는 198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로마 시내에는 세계 가톨릭 교회의 본산인 바티칸이 위치해 있으며, 기독교의 중요한 성지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로마는 '세계의 머리(Caput mundi)', '영원한 도시(la Città Eterna)'라 불리며, 그 역사적 중요성과 문화적 위상을 가집니다. 도시 설립 연대는 전설적으로 기원전 753년으로, 2047년에 설립 2800주년을 맞이합니다.

 

 

고대로마 제도 - 공화정의 형성과 융성기(기원전 509 ~ 264)

로마 공화정의 역사는 로마 전체 역사에서 왕정과 제정 사이의 중간 단계로 위치한다. 로마는 왕정과 함께 시작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로마를 건국한 인물인 로물루스가 등장하며, 그는 군신 마르스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그의 손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전해진다. 로마의 왕정은 기원전 509년 공화정이 성립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부족하며, 전승된 자료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학자들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대체로 여러 차례의 군사적 패배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쇠퇴가 왕정의 몰락을 초래했다고 많은 학자들이 분석하고 있다.

 

공화정은 원래 '리퍼블릭(republic)'이라는 용어의 번역어로, 그 어원은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이다. 이는 '물건(thing)'이나 '일(affair)'을 의미하는 '레스(res)'와 '공공의(public)'를 뜻하는 'publicus'의 결합으로, 공적인 일이나 공공의 재산을 나타낸다. 레스 푸블리카, 즉 공화국은 왕이나 소수의 귀족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시민에게 속하는 공유물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공화국은 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공적인 사안들을 왕이 아니라 시민들이 스스로 결정하는 정치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로 인해 공화주의는 시민들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자치, 즉 자유의 원리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고대 아테네에서 발전한 민주주의와 시민의 자치 이념을 공유한다.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이 등장했지만, 초기 로마의 공화정은 내부와 외부의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외부의 위협과 귀족과 평민 간의 내부 갈등을 극복하면서 로마 공화정은 성장해 나갔다. 귀족과 평민 간의 투쟁은 로마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전환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평민들은 귀족들과의 갈등에서 전쟁에 참여하며 권리를 쟁취했다. 그들은 자유 정부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귀족들도 높은 책임감을 가지고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시민병사와 귀족들이 함께 힘을 모아 싸웠다. 기원전 367년, 평민과 귀족 간의 갈등이 완화되며 평민이 집정관이 될 수 있는 법이 제정되었다. 로마는 주변 강대국을 정복하면서 피정복민들을 포용하며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포용정책은 동맹국들의 충성을 이끌어내어 로마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대로마 제도의 전성기와 쇠퇴기 그리고 멸망

로마 공화정의 전성기는 기원전 264년 카르타고와의 첫 전쟁이 시작된 시점부터 기원전 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이 시작되는 시점까지를 포함한다. 이 시기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지중해로 확장하며 카르타고와의 전쟁인 포에니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제1차 포에니전쟁(264-241년) 이후, 제2차 포에니전쟁(218-201년)에서 한니발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지도자들의 단결과 전략적 승리로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전쟁 이후 로마는 그리스인들의 독립 희망을 억제하고 제국주의 정책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멸망은 로마의 잔혹함을 드러내어 후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로마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 즉 평민과 귀족 간의 분열이라는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공화국의 몰락은 이러한 내부 분열에서 비롯되었고, 각 세력은 평민과 귀족의 이해를 대변하며 갈등을 심화시켰다.

 

기원전 133년, 극단적인 귀족파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비롯한 로마 시민 300여 명을 폭력적으로 살해했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30세였습니다. 이후 기원전 123년에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으로 선출되어 형보다 더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했으나, 보수적인 귀족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다. 결국 가이우스는 지지자들과 함께 살해당하고, 그 수는 3천 명에 달했다. 이러한 사건은 귀족들이 공공선을 위해 헌신했던 과거의 고귀한 정신을 잃고,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기원전 100년 7월 12일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카이사르는 기원전 58년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하여 9년간 그 지역을 로마에 귀속시키며 서유럽을 로마 문화권으로 편입시켰다. 기원전 52년 폼페이우스가 귀족의 지원을 받아 단독 집정관이 되자, 기원전 49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고 귀환을 명령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며 내전을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전쟁 후 로마를 재건하고, 기원전 45년에 원로원 수를 확대하는 등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집중시키며 공화정과의 양립이 불가능해졌고, 결국 기원전 44년 3월 15일 정적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로마는 다시 내전에 휩싸였고, 그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며 내전을 종식시켰다. 이로써 기원전 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 이후 1세기 동안 이어진 내전이 끝났고,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 ‘존엄자’와 ‘제 1시민’의 칭호를 부여받아 사실상의 황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써 로마 공화정은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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