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역사 24편 문명의 발달 서양 고대사2
고대 수메르 사회에서 이자 개념은 목축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수메르어에서 이자를 의미하는 "mash"는 송아지를 뜻하기도 하며, 고대 그리스어 "tokos"와 라틴어 "pecus"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어 "ms"는 "낳다"라는 뜻인데, 이러한 언어적 유사성은 이자가 가축의 번식에서 유래했음을 시사한다.
우루크 사람들은 목축 사회로서 이자 대금업의 발달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계약서를 기록하고, 재화의 수량을 명시할 수 있는 수 체계를 발전시켰다. 또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달력의 발전으로 시간의 수리적 연계를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금융의 기초가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600년 이후 민간 금융 부문에서 보다 발전된 금융 거래 형태가 등장했다. 예를 들어, 바빌론의 상인 은행가인 에기비선즈와 무라슈는 정부와 개인에게 대규모로 자금을 대출하고, 상인 고객의 요청에 따라 상인 간의 계좌 이체를 진행하며, 예금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고, 토지 담보 대출 채권을 매입하는 등 복잡한 금융 업무를 처리했다. 이들은 조합원의 자격으로 벤처 사업에도 참여하며, 대규모 금융 거래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거래를 현대적인 금융 용어로 설명한다고 해서 바빌론의 금융 환경이 현대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동양의 절대 군주는 신적인 권위를 가졌던 통치자였으며, 21세기 금융이 신 바빌로니아의 금융보다 훨씬 발전해 있는 것처럼, 기원전 600년의 신 바빌로니아 금융은 적어도 원시 시대의 금융보다 진보했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 1000년경에는 전문 금융 기관이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법에 따르면 사업 계약에 따라 법적 절차를 시작하는 자는 그 절차가 지속되는 동안 일정 금액의 금전을 예치해야 했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금융 거래 유형을 살펴보면, 그 시대의 금융 환경에 대한 대략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은 메소포타미아 역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는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고 동방 세계와의 문화적 교류를 촉진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역사적 맥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서론에서는 메소포타미아의 역사적 배경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영향력,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알렉산드로스(Alexander)는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군주이자 정복자인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56년에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나났다.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 왕국을 기반으로 하여 그리스 전역을 정복한 후, 페르시아 제국을 침략하였다 알렉산더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전투에서의 기동성과 전술적 재능은 후세의 군사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마케도니아의 군사 전략 체계
- 군량 수송 체계: 마케도니아군은 짐차 사용이 제한되어 천막 등은 가축이 직접 운반했다. 가축은 주로 말을 사용하고, 소는 행군 속도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다. 원정 중 가축 한 마리당 평균 수송 능력은 약 250파운드로 추정이다.
- 병력 및 물자 소비: 알렉산드로스의 병력은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48,100명으로, 기병은 6,100명이었다. 식량 소비량은 성인 남자 하루 3파운드, 수송용 가축은 하루 10파운드의 곡물이 필요했다.
- 마케도니아의 정치적 변화: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의 동생 필리포스 3세와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가 공동 통치했으나, 필리포스는 음모로 살해되었고, 알렉산드로스 4세도 처형당하면서 왕조가 단절되었다.
- 원정의 목적: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전쟁의 복수를 위해 동방 원정을 시작했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제국을 확장했고,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결과적으로 괴멸시켰다.
- 결과: 알렉산드로스는 인도까지 진출하며 방대한 제국을 형성했으며, 그의 정복은 필리포스 2세의 강력한 군대와 병참 시스템 덕분에 가능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사적 업적과 그의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알렉산더에게 약탈당한 페르시아
BC 331년,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군대는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함락했다. 이 과정에서 병사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약탈을 지속하며, 남성들은 살해되고 여성들은 포로로 잡혔다. 궁전은 불에 타고, 알렉산더는 이러한 약탈과 학살을 묵인하며 100년 전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에 대한 복수를 실행했다. 알렉산더 군은 페르세폴리스 궁전에서 18만 탤런트의 금화를 전리품으로 획득했으며, 이는 대부분 금괴와 금화, 은화 형태로 총무게가 3,000톤에 달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BC 331년 페르세폴리스를 정복한 후, 그는 약탈한 금화를 어떻게 처분할지 논의했다. 재정담당자들은 금을 주화로 만들어 유통하면 물가가 급등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소량만 주조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알렉산더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쟁 비용 외에는 통화를 주조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 시민들은 금을 나눠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표출했고, 알렉산더는 이를 이해하여 일부 금을 본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군사비를 과도하게 지출하면서 약탈한 금의 상당수가 소비되었고, 결국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알렉산더의 사후, 그의 장군들은 금을 남용해 군대를 양성하고 영토 확대에 사용하면서 물가가 폭등했다.
알렉산더 사후 20년 동안 바빌론의 물가는 급격히 상승했으며, 이는 역사상 가장 큰 물가상승으로 사례로 여겨진다. 고통받는 시민들은 식량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고대 동서양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가장 매료되는 부분은 그의 군사적 면모나 전략가로서의 능력보다는 생전 그가 지닌 세계관과 사상이다. 그의 사상은 고대 그리스인의 전통적인 세계관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린 시절, 당시의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교육을 받았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그리스 외의 문명은 야만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 같은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그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그의 세계관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는 그리스인이 야만이라고 여겼던 페르시아의 뛰어난 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들의 복장과 풍습을 따르기까지 했다.
그는 정복한 지역의 관리들을 기용하고 그들의 관습을 인정하는 한편,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고자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정복한 여러 지역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워 그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현재 이집트의 제2의 도시로 알려진 알렉산드리아도 그 당시 처음으로 세워진 도시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는 술을 즐기던 중,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우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다음 날, 그는 자신의 행동을 크게 후회하며 그 실수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일화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복잡한 성격과 그의 세계관을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 문화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등 다양한 문화와 접촉하여 융합되었다. 이러한 융합은 예술, 철학, 과학,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나타났다. 예를 들어,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동방의 사상과 결합하여 새로운 철학적 사조가 형성되었다.
상업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알렉산더의 정복으로 인해 그리스와 동방 지역이 연결되면서 교역이 활발해졌다. 주요 도시, 특히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상업 중심지는 다양한 상품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허브로 자리 잡았다. 이로 인해 상인들은 국제적으로 거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경제는 산업과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경제적 발전이 크게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러한 발전의 배경에는 몇 가지 주요 요인이 있다. 첫째,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으로 인더스강에서 나일강까지의 광대한 지역이 교역의 장으로 개방되었다. 둘째, 페르시아에서 유통된 금은이 물가 상승을 초래하고 투자 활동을 촉진했다. 셋째, 국가 수입 증가를 위한 방안으로 상공업이 적극적으로 장려되었다. 이와 같은 요인들은 대규모 생산, 무역, 금융 제도의 성장을 가져왔고, 국가가 주요한 기업가 및 자본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발전의 결과로 대도시가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도시 발달은 대다수 인구가 농촌에 거주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로의 인구 집중 현상이 두드러졌다. 각 도시는 크기와 인구 면에서 급속히 팽창하였으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는 1세기 동안에 인구가 4배로 증가했고, 티그리스강 연변의 셀류키아는 2세기 남짓한 기간에 수십만 명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로 발전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도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고대 역사에서 다른 어떤 도시도 그 규모에서 알렉산드리아를 초월하지 못했다. 이 도시는 잘 정비된 거리와 공공건물, 공원, 박물관, 그리고 수십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을 갖추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서 특히 과학 연구의 중심 역할을 했다.
알렉산더에 의해 건설된 헬레니즘 세계는 동서 문화를 융합하여 세계적인 문화 형성을 이끌었다. 그리스어는 공용어로 자리 잡았고, 폐쇄적이었던 폴리스 문화는 보다 개방적인 보편 문화로 변화했다. 이 광대한 지역은 각기 다른 지역적 특성을 가지면서도 세계화된 그리스 문화를 수용하는 통일된 양상을 보였다. 헬레니즘은 고전적 폴리스 문화가 넓은 시각을 갖게 된 하나의 창으로, 이 창은 이후 로마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