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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역사 20편 화폐의 발달 과정 중국 근대사9

by cellife 2024.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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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역사 20편 중국 근대사 청나라 상단들

 

중국의 다양한 지역 상인 집단들은 각기 독특한 전통과 상인정신을 가지고 있다. 산동지방의 상인들은 유교의 전통을 강조하며, 특히 취푸(曲阜) 지역은 유교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중국의 대표적인 세 가지 상인 집단인 휘상(徽商), 진상(晉商), 차오상(潮商)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휘상은 주희의 사상을 존중하며, 이들의 경영 철학은 유가의 영향을 받다. 진상은 의리의 상징인 관우를 숭배하며, 역사적으로는 황허 문명 발상지인 산서 지역에서 발전하였고, 소금과 차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반면, 차오상은 광둥 지역의 상인들로 명나라 이후 해외 무역을 시작하면서 성장했다. 현대에 들어서는 해외 이민을 통해 홍콩 및 동남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새로운 상인 집단인 원저우 상인은 경제적 고립 속에서 근면함을 통해 성과를 이루었고, 특히 작은 상품 시장을 활용하여 글로벌 시장에 진출했다. 이들은 중국 개혁개방의 성공 모델로 여겨지며, 경제 발전의 중요한 주체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상인 집단들은 각기 다른 역사적 배경과 철학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 경제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휘상은 주로 소금 거래를 통해 재산을 모았다. 청나라 시절, 소금 산업은 정부가 관리하는 전매제도였기 때문에, 조정 관리와의 연결이 없이는 사업을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휘상들은 관료와의 결탁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전형적인 정치 상인으로 자리 잡았다.

 

휘상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는 청나라 말기의 호설암(胡雪巖, 1823~1885)이다. 그는 뛰어난 상업적 감각과 정치적 연줄을 활용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호설암은 소금 거래뿐만 아니라 다양한 산업에 손을 대며 사업을 확장했으며, 정부와의 유착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했다. 그의 영향력은 단순히 경제적 차원을 넘어 정치와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당시 청나라의 상업 환경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청나라 대표 상인 홍정상인 호설암

호설암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란 인물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으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12세에 아버지를 잃고 생활이 더욱 힘들어지자 어머니는 그를 항주에 있는 금융기관인 신화 전장에 취직시켰다. 호설암은 긍정적인 성격 덕분에 힘든 일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해냈고, 일의 습득 속도도 빠른 편이었다. 남들이 반나절 걸릴 일을 그는 몇 시간 내에 끝낼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3년 동안 노력한 결과, 그는 점장의 눈에 들어 정식 직원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일을 하면서 호설암은 사람들의 성격과 인물됨을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을 키우게 되었다. 그리고 20세의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된 선비 왕유령과의 만남이 그의 인생을 크게 바꾸게 된다. 평범한 모습의 왕유령이지만, 호설암은 그가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고, 왕유령이 과거시험 응시를 위한 돈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은자 500냥을 아무 조건 없이 건네주었다.

 

왕유령은 상경하여 민부우시랑 하계청(何桂淸)의 지원을 받아 절강성 순무 문하에서 양대총판의 자리를 확보하게 된다. 왕유령은 호설암의 은혜를 잊지 않고, 절강성의 군사 관련 업무를 그에게 맡겼다. 호설암은 부강전장이라는 금융기관에서 중요한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고, 그는 이 기회를 잡아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다. 처음 한 개였던 전장은 순식간에 20개로 늘어났고, 그로 인해 절강성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호설암은 군량미와 군수 물자를 공급하며 조운 등의 업무를 처리하면서 사업을 번창시켰다.

 

호설암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20만냥을 투자하여 호경여당이라는 약방을 설립했다. 이는 가난으로 인해 병원에서 약 한번 써볼 수 없었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다. 호경여당의 경영 원칙은 이윤 추구보다는 진심을 바탕으로 하여, 항상 구급약이 상비되어 있었습니다. 나날이 번창해가는 호경여당은 주변 약방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고객들이 호설암의 인품과 약품의 품질을 인정하며 계속 찾아왔다.

 

1861년, 호설암은 좌종당과의 인연 덕분에 또 한 번 크게 성공한다. 홍수전과 농민 반란군이 세운 태평천국이 양절 지역에서 난을 일으키자, 호설암은 상해에서 군수 물자와 군량미를 항주로 보내 청나라 군대를 지원했다. 그러나 1862년 항주가 태평천국 군대에 함락되면서 왕유령이 자결한 후, 호설암은 물자를 실은 배를 정박할 곳이 없어졌다. 그는 배 안에 군수 물자를 숨겼고, 좌종당의 군량미 부족 소식을 듣고 즉시 군량미와 물자를 모두 기부했다.

 

청나라 말기 위기에 기회를 잡은 군상軍商 호설암

항저우는 태평천국군의 공격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이수성이 이끄는 태평천국군은 장시에서 패배한 후 저장으로 후퇴하며 항저우를 휩쓸었다. 성 안의 양식이 바닥나고 아사자가 십만 명을 넘는 참상이 벌어졌다. 결국 저장순무 왕유령은 성문을 열어 백성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기로 결정하고, 12월 29일 항저우는 함락되었다. 

 

이로 인해 호설암은 1862년 식량 공급을 담당하는 좌군판량대 겸 운송 책임자인 전운국무로 임명되었다. 그는 프랑스 군관과 함께 서양식 무기로 군대를 훈련시키고 전쟁 피해를 복구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1865년 호설암은 좌종당에게 청나라 해군력을 증강하기 위한 복주선정국 창설을 제안했고,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선박 제조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는 외국인 조선 기술자들을 초빙하고 노동자를 고용하여 선박을 제작했다.

 

항저우의 함락은 청 조정에 큰 위기감을 주었고, 증국번의 추천으로 좌종당이 저장순무로 임명되었다. 좌종당은 태평천국군을 무찌르기 위해 '상첩군'을 조직하고, 서양 무기로 무장한 이 군대는 프랑스 군관의 지휘를 받았다. 서양 총포 구매를 위한 막대한 자금을 지원한 인물은 호설암이었다.

 

호설암은 이후에도 좌종당에게 많은 지원을 하였고, 1877년 서정할 때 군량미와 1,200여 만 냥의 자금을 차관으로 들여와 서양 무기를 구매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정부의 무기 구입 대행과 외국 차관 유치로 막대한 상업적 이익을 거두었으며, 좌종당의 추천으로 1품 관직을 받았다. 또한, 군공을 세워 황마괘(黃馬褂)를 서태후에게 하사받았고, 붉은 산호가 박힌 모자를 수여받아 사람들 사이에서 ‘홍정상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항저우의 수복을 위해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좌종당은 군자금이 절실했으며, 호설암은 그에게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는 든든한 후원이 되었다. 반대로 호설암에게도 좌종당은 강력한 뒷배였다. 좌종당의 승승장구는 호설암의 사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호설암의 저택은 전성기인 1872년부터 1875년까지 지어졌으며, 그의 부강(阜康)전장은 20곳이 넘는 지점을 운영할 정도로 번창했다. 그는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채 10년도 되지 않아 급작스러운 파국이 찾아온다.

 

외국 자본과 결합한 반대파에 파벌의 희생자가 되다

 

호설암(胡雪巖)은 외국 상인에게 넘어간 생사(生絲) 사업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재산 대부분인 2천만 냥을 투자하여 생사를 모두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1882년, 호설암은 비단 생산에 필요한 생사를 대량으로 매입했다.  호설암은 생사 가격을 높게 책정하며 절대 낮추지 않았다. 당시 생사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서양 상인들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는 생사 가격이 오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듬해 이탈리아의 생사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가격이 하락하게 되고, 외국 상인들은 생사를 더 이상 구입할 수 없게 되자, 생사는 보관이 어려운 특성상 헐값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1883년 호설암의 생사를 보이콧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로 인해 호설암은 생사 재고를 떠안게 되었고, 무려 800만 냥의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추가 투자를 시도했으나, 이는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고, 결과적으로 추가로 400만 냥의 손해를 보게 되었다.   

 

같은 해,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놓고 전쟁이 발발했다. 좌종당은 조정의 명령을 받고 전투에 투입되었고, 이 기회를 틈타 이홍장(李鴻章)이 호설암을 무너뜨리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이홍장은 좌종당을 치기 위해서는 먼저 호설암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호설암은 좌종당의 군비 조달을 위해 외국은행에서 대출받은 자금의 상환일이 다가오자, 자신의 자금을 동원해 대출금을 갚았다. 그러나 이홍장은 청나라 정부가 걷은 군비 자금을 고의로 지급하지 않았다.

 

결국, 호설암의 전장에서 고액 예금주들이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하면서 뱅크런이 발생했고, 1883년 12월 각지의 부강전장이 잇달아 문을 닫게 되었다. 호설암은 손 쓸 틈도 없이 급작스럽게 파산하고 말았다. 그의 인생은 영화 같은 성공에서 불행한 결말로 급변하게 되었다.

 

 

 

청나라 말기 거상 호설암 총평가

 

호설암의 사상은 확고한 원칙을 지닌 인물이며,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돈을 버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부정한 방법, 즉 법을 어기거나 불법적으로 얻은 돈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인맥을 통해 돈을 벌 수 있지만, 그로 인해 타인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남의 이익을 가로채거나 밥그릇을 깨뜨리는 일은 피해야 한다.

 

셋째, 친구의 힘을 빌려 돈을 벌 수 있지만, 그 친구에게 미안할 정도로 그 힘을 의존해서는 안 되며, 돈을 빌렸다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 장사 과정에서 큰 돈을 벌 기회가 오더라도, 신용과 신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다.

 

돈을 버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큰 돈을 벌게 된다면 반드시 그 돈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익을 취한 만큼 선을 베푸는 것이 중요하며, 단순히 돈만 쫓는 장사치나 구두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호설암은 물욕에만 집착하지 않고 나눔과 환원을 중요시한 인물이었다. 그는 '혼자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잘 사는 방법'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지녔다. 호설암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듣는 사람으로,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데 더 집중했다.

 

그는 또한 '배움에 대한 관대함'을 보여주어, 좋은 의견에는 동조하고 아랫사람의 충고에도 열린 마음으로 응답했다. 많은 돈을 벌었지만, 동시에 이를 아낌없이 나누는 독특한 상인이었다. 무료로 약을 나누고, 수해나 기근이 발생했을 때는 수백만 원을 풀어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 도로와 나루터를 만드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처럼 호설암은 경제적 성공을 넘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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