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사 명나라 멸망 원인
명나라의 환관정치는 정치적 권력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여러 폐해를 초래했다. 환관들은 황제의 측근으로서 주로 궁중에서 활동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들은 종종 황제의 신임을 받으며 권력을 확대했고, 이는 정치적 부패와 혼란을 초래했다. 환관정치의 폐해는 심각한 국가재정의 적자를 초래했다. 신종은 은산 개발을 추진했지만, 환관에게 맡긴 이 작업이 실패하자 물품세 부과 등 증세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환관들은 개인의 이익을 챙기며 비리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러한 폭정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서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고, 서원 내 사숙들은 주자학을 연구하며 정부를 비판하고 혁신정치를 주장하는 동림당을 창당했다.
동림당의 세력을 정부에 끌어들인 환관 왕안으로 인해 정계는 동림당과 엄당(환관들로 구성된 세력)의 대립 상황으로 변했다. 이 혼란 속에서 환관 위충현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천계제의 유모인 객씨와 결탁하여 내정 지배, 경찰기관 동창 장악, 동림당 인사 투옥 등의 행동을 통해 권력을 강화했다. 위충현은 환관정치의 폐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환관들은 황제의 권력을 이용해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였고, 이는 결국 명나라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한 요인이 되었다.
명나라는 청나라의 공격과 내부의 농민 반란으로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 1621년, 사천 지방에서 사숭명奢崇明이 난을 일으켰고, 이어 1627년에는 이자성의 난이 발생했다. 같은 해 즉위한 숭정제는 기울어진 명 왕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장헌충도 봉기를 일으켰고, 명나라는 청군과 반란군에게 모두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1642년 명군이 청나라에 대해 대공세를 펼친 송금 대전에서도 참패하였고, 이로 인해 산해관을 제외한 북방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청군은 산해관 앞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명나라 조정은 주력군이 청나라와의 전투에서 대부분 붕괴되자 북방 방어에 급급해졌고, 나머지 지방군들은 농민 반란군에 연속적으로 패배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계속되었다.
결국 1644년 4월 25일, 손전정의 관군이 이자성군에게 참패하면서 이자성군이 북경을 함락하게 되었고, 숭정제는 경산에서 목을 메고 자결함으로써 명나라는 276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사라지게 되었다.
명나라 후기 조세 정책
명나라는 1368년 태조 홍무제에 의해 건국된 후, 활발한 대외 원정과 내정 개혁을 통해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영락제의 통치 아래에서 명나라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었으나, 이후 등장한 4대 암군의 통치로 인해 내정이 해이해지면서 북로남왜(북쪽의 몽골족과 남쪽의 왜구)로부터의 침략이 심화되었고, 결국 여진족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었다.
이갑제가 해를 거듭할수록 부과되는 노역과 세금의 사무 작업이 복잡해지면서 시민들의 부담이 과중해지고 불공평한 상황이 심각해졌다. 이에 만력제 시대의 재상 장거정은 명 중엽 이후 전국적으로 진행되던 조세 개혁을 통일하여 실시하였고, 이를 일조편법이라 부른다.
일조편법은 복잡한 세금 체계를 간소화하여 모든 세목을 단일화하여 납부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정통 연간부터 진행된 은납화 경향과 함께 상당한 재정적 효과를 가져왔다. 이와 함께 장거정은 전국적인 토지 장량을 실시하고 황실 재정을 긴축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재정 상황을 호전시켰다.
하지만 장거정이 사망한 이후, 만력제의 사치로 인해 이러한 재정 개혁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588년 건주여진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임진왜란이 발발할 무렵 이미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당시 누르하치는 조선을 향해 원군 파병을 제안하며 명나라와 조선을 자극하지 않는 방향으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명나라가 요동 지역의 군대(북병)를 조선으로 파병하고 내부 반란 진압에 집중하던 시기에, 누르하치는 숙적인 해서여진을 장악하며 점차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했다.
결국 1616년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국하였고, 1618년에는 명나라에 대한 불만을 표명하며 일곱 가지 한(恨)을 제시하고 본격적으로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명나라의 쇠퇴와 여진족의 세력 확대를 더욱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후금(여진족) 경제 활동
여진족은 북방 지역과 남방 지역 간의 무역 경로에서 중간 역할을 하며, 명나라와 몽골, 만주 지역의 다양한 상품을 교환하는 중요한 중개자로 자리잡았다. 이들은 명나라에서 수입되는 농산물, 의류, 공예품 등을 북쪽으로 운반하고, 반대로 여진족 지역에서 생산되는 모피, 약재, 금속 제품 등을 명나라로 수출함으로써 다양한 상품을 취급했다. 무역을 통해 여진족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며 상업적 기술과 경영 전략을 발전시켰다. 명나라 상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상업적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상인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했다. 이러한 무역 활동은 단순한 상업적 교류를 넘어 여진족과 명나라 간의 정치적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명나라 정부는 여진족과의 무역을 통해 안정적인 국경을 유지하고, 북방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협력을 도모했다.
또한, 중간 무역을 통해 여진족과 명나라 간의 문화적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상인들은 서로의 언어와 문화, 관습을 배우며 이러한 과정은 양측의 사회적 통합에 기여했다. 결과적으로, 여진족의 중간 무역 활동은 명나라의 경제적 안정과 정치적 관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후에 청나라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청나라 경제 정책
농업 부문에서는 양쯔강 중류에 위치한 후난(호남)과 후베이(호북) 지역의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곡창지대가 형성되었다. 또한, 타이완, 광서, 동북 3개 성에서도 개척이 이루어졌고, 벼, 종이, 소금, 마, 콩과 같은 전통 작물 외에도 옥수수, 고구마, 담배, 땅콩 등의 새로운 작물이 재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농민과 도시 서민의 생활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공업 분야에서는 생사와 견직물 외에도 면직물의 가내공업이 확산되었으며, 경덕진에서는 수십만 명이 도자기 생산에 참여하여 분업 체제가 확립되었다.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면서 인구는 18세기에는 약 3억 명, 19세기에는 4억 명으로 증가하였고, 중국 전역이 개발되었다. 이주가 금지되었던 만주와 남양, 장쑤, 저장, 푸젠, 광둥 해안 지역에도 많은 인구가 이주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만주족은 초기에는 우대를 받으며 자원을 공급받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지원이 줄어들고 생활이 어려워졌다. 농업과 공업의 발전은 상업의 성장으로 이어졌고, 상인들은 각 지역에 회관을 설립하며 이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거래를 추진하고 해외 활동도 점차 증가했다. 주민들의 통제를 강화하고 해양세력과 결탁하여 해적이 되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는 해금령을 통해 무역을 차단했던 명나라에 비해 해외교역량도 증가했다.
광동 일항(一港) 체제 하에서, 절해관은 영파의 행정구역에 속하는 주산 군도(舟山群島) 정해(定海)에 서양 선박이 기항할 수 있는 구역을 설정했다. 이로 인해 영국 상인들이 정해로 몰려들어 명주와 차(茶) 등을 구매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광주의 경제적 쇠퇴가 초래되었다.
외국과의 교역을 관리하는 월해관(粤海關)은 1685년에 설치되었으며, 민해관(閩海關)의 하문(夏門)과 절해관(浙海關)의 영파(寧波)와 경쟁 관계에 있었다. 18세기 중반에는 강남(江南)을 배후로 한 다양한 물산이 모여들면서, 일본과의 교역에서 큰 거래액을 기록한 영파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절해관은 영파의 관할 지역 내 주산 군도(舟山群島) 정해(定海)에 서양 선박의 기항 구역을 설정하였고, 이로 인해 영국 상인들이 정해로 몰려들어 명주와 차 등을 구매하게 되면서 광주의 경제적 쇠퇴가 더욱 두드러졌다.
이에 따라, 광주에서 이권을 가진 팔기군(八旗軍)과 관료들이 조정을 움직였고, 건륭 22년(1757)에는 건륭제(乾隆帝)가 서양인과의 교역을 광주로 한정하도록 상유(上諭)를 내렸다. 무역항이 광주로 제한된 이유는 서양 배들이 광주에 집중하게 하여, 그로 인한 이익이 광동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지역인 강서(江西)까지 미치게 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강남 지역은 이미 일본과의 교역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 상인들까지 영파에 집중된다면 화남(華南) 지역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 조세 제도
강희제는 1711년에 자신의 즉위 50주년을 기념하여 국가 재정의 안정성을 기반으로 획기적인 세금 감면 정책을 시행했다. 이 정책의 핵심은 1712년부터 출생하는 백성들에게 인두세를 부과하지 않는 것이었다. 즉, 신규 출생 인구에 대해서는 세금을 징수하지 않겠다는 방침으로, 세금 총액을 인구 증가에 관계없이 고정하고 인구가 늘어도 인두세를 늘리지 않겠다는 정책이었다.
또한, 강희제는 인구 수를 파악하기 위해 성세자생인정 정책을 도입했다. 성세자생인정은 국가 번영의 시대에 태어난 사람을 의미하며, 1711년의 세금 감면 정책을 기점으로 이후 조사된 증가된 인구를 이 명칭으로 불렀다. 이러한 인두세 감면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당시 농업 생산력은 가족 구성원이 많을수록 높아지기 때문에 농민들은 자녀를 많이 낳고 싶어 했지만, 인두세 때문에 자녀 수를 줄여 신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파악한 강희제는 1711년의 인구수를 기준으로 납세 인구 수를 정하고, 전국적으로 과세하는 인두세를 이 기준에 맞춰 고정했다. 세금을 동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청나라가 중국 강남을 실질적으로 통합한 후 세금 수입이 풍부해져 정부의 지출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금 감면 정책의 효과로 농업 생산량이 증가했지만 세금은 정해져 있었기에 농민들의 소득이 늘어나 생활이 향상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출산율도 높아졌고, 1850년대에는 청나라 인구가 약 4억 명을 돌파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인구가 생산성 증가를 초과하게 되었고, 청나라 관료조직의 부패와 함께 국가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요인이 되었다.
세금 감면으로 농민들의 생활이 개선되었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세금 감면 이전에 세제 개편을 통해 골고루 혜택이 국민에게 돌아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었고, 당시 세제 개편이 민감한 문제였던 만큼 단기적 처방으로 강희제 개인의 우상화와 연결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존재했다. 그러나 양자강 남쪽을 평정하고 국가 재정을 안정시킨 후 세금 수입을 동결하며 증가하는 인구에 대해 세금을 늘리지 않았던 강희제는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성세자생인정 세금 감면 정책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광주십삼행(廣州十三行)과 관세징수 체계는 중국에서 아인(牙人) 또는 아행(牙行)이라고 불리는 중개매매인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명나라 후기에 해금(海禁)이 완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일부 아인에게 거래를 집중시키고, 이들이 징세를 대행하도록 하여 전체 상인을 관리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청조(淸朝) 역시 이러한 방침을 이어받아, 국내외 무역을 가리지 않고 아행을 통해 징세를 담당하는 제도를 운영했다.
1720년(강희 58년) 이후, 광주에서는 서양 무역을 처리하는 상인들이 광주십삼행(廣州十三行) 또는 광동십삼행(廣東十三行)이라는 특권 상단으로 제한되었다. 이러한 제도는 유럽인들에게는 전근대적인 상단의 독점 또는 보호무역정책으로 비쳤다. 그러나 청나라에서는 해외로의 거래가 가능했기 때문에, 무역 정책은 국내산업 보호보다는 평화와 치안 유지를 위한 측면이 강했다.
건륭제의 상유(上諭)에 따라 서양 상인과의 교역이 광동의 한 항구로 제한되었고, 특권 상인에게만 무역을 허용하는 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이로써 광동 체제가 형성되었고, 장기적으로는 무역의 독점을 통해 과세를 강화하는 정책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청나라 금융 정책
청나라는 광산 산업의 사유화도 장려했다. 청조는 광산업에서 손을 뗐고, 무기나 동전 따위를 주조하는 데에 필요 철, 금, 은 같은 금속들을 대부분 시장에서 사들이는 방안으로 선회했다. 이에 따라 중국의 광산업은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광둥성을 중심으로 광산업의 발달이 찾아왔다.
화폐 단위의 가치와 은의 일정량의 가치가 등가관계를 유지하는 본위제도, 서로 다른 화폐를 쓰는 여러 국가가 공동으로 채택하는 환율제도의 하나인 은본위제를 본격적으로 실시로 은에 수요가 많이 찾아오게 된다.
지정은제는 청나라 시기에 시행된 조세제도로, 정세(丁稅)를 지세에 통합하여 농민들이 지세(地稅)만 납부하도록 한 은본위의 조세 체계다. 지정은제가 도입되기 전, 청나라는 지세와 정세를 함께 징수하는 일조편법을 운영했다. 그러나 호구조사의 부정확성과 인구를 은닉하려는 탈세 행위가 만연하면서 정세의 부과가 점점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1713년(강희 52년), 강희제는 1711년에 기준을 두고 그 이후 조사에서 증가한 인구에 대해서는 정세를 부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정책은 정세 수취량을 고정시켰으나, 정세를 징수당하는 농민들이 도망치는 사례가 발생하면서 수취량이 다시 감소하기 시작했다. 강희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세 1냥당 소량의 정세를 부과하는 탄정입묘(攤丁入畝) 방식을 도입하였고, 이로 인해 정세가 지세와 합쳐졌다. 이 방법은 처음에 광둥성에서 시행되었고, 옹정제 시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지정은제 하에서는 세금을 은으로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은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고, 이는 서양 국가와의 대외 무역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특산물인 비단과 도자기 등을 은과 교환하는 무역 형태가 자리 잡게 되었다. 1800년부터 1839년 사이에 중국에 밀수된 아편으로 인해 약 6억 냥의 은이 유출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 인해 지정은제가 위협받게 되었다. 은과 동전의 교환 비율이 1:800에서 1:1,500~2,100으로 급변하면서 민생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그동안 은닉되어 있던 인구가 호적부에 새롭게 추가되면서 인구가 급증하는 경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