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사6 중원의 당시 화폐 역사3
교초(交鈔)와 보초(寶鈔)는 중국의 금(금)과 원(元) 시대에 발행된 지폐로, 원나라 시기인 1260년부터 1356년까지 널리 유통되었다. 세계 최초의 지폐인 송(宋) 왕조의 교자(交子)와 달리, 교초는 처음부터 통화로 발행되어 더 넓은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육상과 해상을 통한 국제 교역의 증가는 중국의 화폐 제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으로 동전을 사용하는 동본위제에서 고액 결제의 한계를 느낀 상인들은 송대부터 약속어음과 유사한 교자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교초의 사용이 확산되었다.
금 왕조는 송대의 교자를 이어받아 12세기 중반에 교초를 발행하였다. 금 왕조 말기에는 지폐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신교초를 발행했으나, 민간에서는 은화를 선호했다. 특히 화베이 지역에서는 동전 발행이 어려웠고, 금 왕조는 북송을 정복한 후 송 왕조의 교자를 계승하여 지폐와 은화를 도입했다. 해릉왕 시대에도 교초가 발행되었고, 이후 '승안보화'와 '원보은' 같은 은화도 발행되었다.
원 왕조는 태종 우구데이 칸 시기에 교초를 발행하기 시작했으며, 1236년에 몽골 제국이 금 왕조의 화폐 제도를 이어받아 교초를 발행했다. 동이 부족했던 점이 교초 발행의 배경이 되었고, 야율초재는 발행량 조정을 제안했다. 쿠빌라이 칸은 1260년에 제로통행중통원보교초를 발행하여 동전을 대체하게 했다. 교초는 10문부터 2관문까지 있었으며, 은과의 태환이 가능했다.
중통원보초는 1260년부터 1273년까지 발행량이 급증했으나, 군사비 증가로 인해 남발되면서 지폐 가치가 급락했다. 이에 원은 1287년에 지원통행보초를 발행하여 소금과 교환 가능하도록 했다. 그러나 다시 지폐를 많이 발행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무종 구육 칸은 1309년에 지대은초를 발행했으나 폐지되었다. 혜종 토곤 테무르는 1350년에 지정교초를 발행했으나 동전 유통이 증가했고, 1356년에 교초는 폐지되었다. 토곤 테무르는 1368년 몽골 초원으로 도망쳤다.
원나라 금융 정책과 책봉국 고려 영향
1310년에는 지대은초가 발행되었으나 곧 폐지되었고, 이후 중통보초가 다시 소액권으로 재발행되었다. 결국 원나라 말기에는 보초의 가치가 급락하여 실거래에서 은이 선호되었다. 원나라는 보초를 통해 확보한 은으로 서방과 무역하여 이익을 얻고, 고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 아래에서 보초가 유입되었고, 이로 인해 고려의 은병 정책이 무너졌다. 원나라가 멸망하자 고려는 1391년에 저화(楮貨)라는 새로운 지폐의 도입을 계획하였으나, 고려의 멸망으로 인해 이 계획은 조선으로 이어졌다.
중원의 패자 한족의 천자 주원장
명나라는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중국을 통치했던 왕조로, 이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시기이다. 명나라의 창건자는 주원장(朱元璋)으로, 그는 몽골의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명나라를 세웠다. 건국 초기, 만리장성 이남의 중원과 내몽골 남쪽 일부, 만주 일부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였다. 15세기 중반까지 대규모 원정을 통해 국가의 위세를 과시하였고, 조선, 류큐 왕국, 대월 등이 사대의 예를 따랐다. 일본은 무로마치 막부 초기부터 명나라에 조공을 시작하였다.
명나라는 농민에 의해 세워지고, 다시 농민에 의해 멸망한 왕조이다. 주원장은 가난한 농부 출신으로, 몽골 제국의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명나라를 건국했다. 그러나 후에 만주족의 청나라가 남하하면서 나라가 어려워졌고, 폭정으로 인해 농민들의 삶이 힘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역시 가난한 농부 출신인 이자성이 주도한 반란이 일어나면서 북경이 함락되고, 황제 숭정제가 자살하게 되며 명나라는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 이후 남명과 타이완의 저항 세력마저 청나라에게 항복하면서 명나라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명나라는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를 갖추었으며, 황제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관리들은 과거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고, 이는 유교적 이념에 기반하여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높였다.
중국 근대 명나라 조세
명은 원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농촌 공동체를 회복하려고 했고, 이는 주원장 태조의 출신 배경과 관련이 있다. 자급자족 농민 질서의 회복을 추구했으나, 남경성 건설 시 벽돌 생산을 마을에 맡기면서 부역 부담이 발생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전근대 시기에 전국적으로 통일된 행정 집행이 가능했던 것은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주원장은 '이갑제'를 통해 농촌 공동체를 조사하고 균질화하려 했으나, 유력 계층의 포괄로 빈부격차를 인정하게 되었고, 결국 한계를 드러냈다. 이갑제는 상당히 정확한 인구 조사 제도로 기능했으며, 1393년부터의 인구 조사는 중국사에서 신뢰할 만한 통계로 여겨진다.
또한, 주원장은 농민이 직접 군인에게 쌀을 전달하는 제도를 시행했으나, 이는 복잡한 상황을 초래했고, 결국 중기 이후에는 병사들에게 은으로 월급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보급 문제는 여러 전쟁에서 명군의 발목을 잡았다. 명 중기 이후에는 지출을 우선 결정하고 세금을 거두는 방식으로 국가 운영이 이루어졌고, 이는 재정 운용의 방만함과 높은 세율로 이어졌다. 정부는 조세 구조 개혁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으나, 지출 조절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강남에서 쌀을 걷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조세가 점차 은납화되었고, 과중한 잡역도 은으로 고용하는 방식으로 대체되었다. 법적으로는 이갑제 하에서 갑을 묶어 행정을 재정비하고, 재산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균요법, 세금을 단계적으로 차등 부과하는 십단법, 호의 등급에 따라 세금을 다르게 부과하는 문은과 정은 제도, 지세와 인두세를 통합하는 일조편법 등이 지역별로 시행되었다.
조세가 은납화되고 지역별로 다양한 개혁이 나타난 것은 이갑제를 벗어난 지역의 행정 단위가 탄력적으로 구성되기 위한 지방관들의 노력과 자발적인 사회 지배 계층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외적의 침입과 반란으로 인한 위기감 속에서 신사들이 주도하였다. 왕양명, 즉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수인은 지역 단위의 자치 및 방위 집단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16세기 초, 이러한 노력들은 결실을 맺어 명 후기에는 향촌이 재건되었고, 명 정부는 이를 행정 단위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명 말기에는 이갑제가 보갑제로 대체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장거정이 대대적인 토지 조사와 일조편법을 시행하면서 조세 개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지주층과 특권 계층의 반발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장거정은 이러한 반발로 인해 사후 모든 명예를 몰수당하게 되었으며, 이는 명나라가 지향했던 '농촌 공동체'의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장거정은 생전에도 부국 강병만을 신경 쓴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이를 수용하며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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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경제 정책
명나라는 원나라의 행정 체계를 이어받아 행중서성과 중서성을 폐지하고, 대신 승선포정사사, 제형안찰사사, 도지휘사사를 설치하여 민정, 형법, 군사 업무를 각각 맡겼다. 정난의 변 이후 북평부는 북직례로, 남경은 남직례로 변경되었다. 명대에는 전통 농업에서 상품 작물 재배로의 변화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이는 상업의 성장과 분업화 현상에 기인했다. 상인들은 원료를 저렴하게 구매하여 비싸게 판매하고, 가공품을 보다 저렴하게 사들여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명대의 중국 경제는 내수 중심으로 폐쇄적인 경향을 보였고, 이는 서유럽이 대항해시대에 급격히 발전한 상황과는 대조적이다. 처음에는 교역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았고, 정화의 아프리카 원정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명나라의 원정은 정치적 동기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경제적 성과는 미미했다. 이는 유교적 이상주의에 기반한 자급자족적인 농촌 사회를 추구했기 때문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영락제와 정화가 사라진 후, 중국은 해상 진출의 원동력을 잃어 바다를 단순한 공간으로 여기게 되었고, 왜구의 위협이 커지자 해금령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화둥 지방, 특히 푸젠 성은 해안과 산악 지역이 많아 어업과 해운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해금령은 치명적이었다. 이로 인해 푸젠 성 주민들은 밀무역에 참여하거나 왜구인 척하는 가왜(假倭)로 조직화되어 해안을 약탈하게 되었다. 명나라의 왜구 토벌이 1567년 종료되면서,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폐쇄하자 상인들의 반발로 제한적으로 푸젠 성 장저우에서의 무역이 허가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상인들은 이를 무시하고 사무역을 활발히 진행했다. 물꼬가 트이자 동남 해안 지역 전체가 개항되었고, 이는 명조 중후기의 번영과 일조편법의 전국적 확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명나라 화폐 정책
명나라 초기에는 지전, 즉 종이 화폐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 했다. 동시에 정부는 해금령을 발동하여 해외 무역을 금지함으로써 금과 은의 유출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지전은 대규모 인플레이션과 위조 범죄로 인해 신용도가 급격히 하락했고, 1425년에는 액면가치의 0.014%로 거래되며 사실상 무너졌다. 결국 지전은 1573년까지 사용되었으나, 1450년부터는 발행이 중단되었다.
이 시기에 명나라는 금속으로 엽전도 주조하였으나, 대다수의 무역은 은괴로 이루어졌다. 은괴는 순도와 크기가 각각 달라 화폐로서가 아닌 귀금속으로 취급되었으며, '테일'이라는 전통 단위로 계산되었다. 이 은괴는 광둥성에서 처음 제작되어 1423년까지 양쯔강 이남으로 확산되었다. 15세기 중반부터 명나라의 대외 무역 여건이 개선되면서 일본과 남아메리카에서 생산된 막대한 양의 은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내부에서 유통되는 은의 양이 급속히 증가하였고, 화폐 경제가 발전하며 내부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1465년에는 세금을 은으로 걷기 시작했고, 1475년에는 소금세와 부역 면제 세금도 은으로 부과되면서 은본위 화폐제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들어서는 스페인과 일본의 교역 차단으로 인해 중국으로 유입되는 은의 양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명나라 내에서 은의 유동성이 감소하고, 지방에서 세금으로 은을 납부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급격한 상황 악화로 인해 명 조정은 일시적으로 폐지했던 지전의 발행을 재개하기에 이른다.
명나라의 금융제도의 총평가
명나라(1368-1644)는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왕조로, 경제와 금융 제도에서 여러 가지 혁신과 변화를 겪었습니다. 주원장(朱元璋)은 농민 출신으로서 농촌 공동체의 회복을 목표로 하였으며, 이는 명나라 초기의 경제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명나라 초기에는 자급자족 농업을 강조했으나, 농촌 공동체의 복구 과정에서 발생한 부역 부담과 인구 조사 제도인 '이갑제'는 경제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이갑제의 한계로 인해 빈부격차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삶은 여전히 어려웠다.
중기 이후에는 군인에게 쌀을 직접 전달하는 제도가 시행되었으나, 이는 복잡한 상황을 초래하고 결국 은으로 월급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상업 활성화에 기여했지만, 조세 구조의 개혁은 재정 운용의 비효율성을 개선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명나라의 경제는 또한 내수 중심의 폐쇄적인 경향을 보였으며, 이는 교역의 제한과 해금령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푸젠성과 같은 해안 지역에서는 밀무역이 활성화되었고, 이는 지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화폐 정책에서도 명나라의 초기는 종이 화폐인 지전의 사용을 시도했으나, 인플레이션과 위조 문제로 인해 신뢰성이 떨어졌습니다. 대신, 금속 화폐와 은괴의 유통이 증가하면서 은본위 화폐제가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15세기 중반부터 일본과 남아메리카에서 유입된 은은 내부 무역을 활성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스페인과 일본의 교역 차단으로 인해 은의 유입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명나라 정부는 다시 지전의 발행을 재개해야 했다. 이는 경제적 위기 속에서 나타난 조치로, 명나라의 경제와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을 드러냈다.결론적으로, 명나라의 경제와 금융은 초기 농민 중심의 자급자족을 목표로 하였으나, 다양한 내부적 및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은 명나라의 궁극적인 몰락에도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