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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역사 16편 화폐의 발달 과정 중국 근대사5

by cellife 2024.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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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대사5 중원의 당시 화폐 역사2

 

송나라 시대에 교자의 편리성이 인정받으면서, 국가에서 이를 공식적으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후 여진족의 금나라를 거치면서 교자는 ‘교초’라는 형태의 지폐로 발전하게 되었다. 여진족은 처음에는 동전을 기본으로 사용했으나, 북송을 정복하고 화북 지역을 차지한 뒤 구리 자원이 부족해지자 1142년에 비단을 기반으로 한 지폐를 발행하게 되었다. 금나라에서는 지폐가 은을 지급 보증 수단으로 삼았으나, 후에 신화폐의 발행과 통화의 증발로 인해 그 신뢰성이 약화되었다. 여진족은 동화를 주 통화로 사용했지만,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북 지방을 차지한 이후 구리가 극히 부족해지면서 지폐 발행의 필요성이 커졌다.

 

금나라는 이와 함께 은화와 동전도 발행하여 금속 화폐와 지폐가 동시에 유통되도록 하였다.  그 중 승안보화(承安寶貨)와 말발굽형 원보은(元寶銀) 같은 형태로 은의 무게에 따라 가격이 정해졌다. 이와 함께 동화도 발행하여 다양한 화폐 형태가 공존하는 경제 체제를 구축하였다.

 

금나라가 남송과의 전쟁과 북쪽 몽골과의 충돌로 인해 전쟁 비용이 급증하면서 지폐가 남발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금나라 말기인 1214년에는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나 1000관짜리 지폐가 발행되기에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금나라는 화폐 개혁을 단행하여 새로운 지폐인 보천(寶泉)을 발행했지만, 이미 시장에서 신뢰를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거부당했다. 결국 사람들은 지폐를 가지고도 은이나 비단으로 교환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과도한 지폐 남발은 금나라의 멸망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되었다

 

중원의 패자覇者 원나라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까지 약 100년 동안, 몽골족의 원나라(1271-1368)는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했다. 원나라는 남송을 정복하여 중국 전토를 완전히 영유한 후, 일본, 베트남, 미얀마, 자바 등지에도 침략을 감행했다. 쿠빌라이 칸의 통치 아래 원나라는 동아시아의 대제국으로 성장했지만, 동시에 몽골 제국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한국의 여러 칸국들에 대한 군림을 시도했다. 그러나 유목 전통을 중시하는 한국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원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며 저항했다.

 

쿠빌라이 칸은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1271년에 원나라를 개창하여 남송을 정복하며 중국을 통일했다. 그는 몽골 제국의 다른 칸국들과의 종속 관계를 끊고 독자적으로 중국과 몽골 지역을 지배했으며, 일본, 대월, 참파를 공격하기도 했다. 원나라는 중국을 정복한 여러 정복왕조 중 하나로, 1368년에 명나라의 공격으로 몽골 지역으로 쫓겨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원나라의 황족들은 북원을 세워 왕조의 연속성을 유지했다.

 

몽골군은 뛰어난 기동력 덕분에 중국 대륙, 중앙아시아, 러시아, 동유럽을 신속하게 정복할 수 있었다. 몽골의 기병들은 한 명이 서너 마리의 말을 데리고 다니며 하루에 200㎞를 이동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였다. 몽골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러시아와 유럽은 큰 혼란에 빠졌다. 고대에는 대규모 군대가 이동할 때 보급부대가 필수적이었지만, 몽골군은 장병들이 자신의 음식을 안장 아래에 보관하며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 따르면, 몽골군은 4~5㎏의 말젖 분말을 휴대하여 아침에 물을 부어 저녁에 불려 먹었다. 전투 중에는 육포 가루를 물에 타서 섭취했으며, 조리하지 않아 적에게 쉽게 노출되지 않았다.

 

몽골은 전 유라시아를 통일하면서 실크로드 외에도 새로운 초원길을 개척했다. 그들은 동서 교통로인 ‘천산북로, 천산남로, 서역남로, 초원길’을 통해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했다. 이러한 통행로에는 마구간과 숙소가 있는 역참을 세워 동서무역을 활성화했다.

 

원나라 금융 정책

원나라 초기에는 은과 비단이 주요 화폐로 사용되었고, 교초 지폐는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다. 금나라에서 관료로 활동하던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의 눈에 띄어 원나라에서도 재무담당 관료로 일하게 되었으며, 금나라에서 사용하던 지폐를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 결과, 2대 황제 오고타이(태종) 때 교초가 발행되었다.

 

원나라의 역참제도는 안전한 실크로드를 열어 동서무역을 크게 활성화시켰다. "금 항아리를 든 여성이 제국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도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원나라는 각 지역의 도시와 항구, 나루터 및 관문을 통과할 때의 통행세와 관세를 없애고, 모든 물품의 세금은 마지막 판매지에서 한 번만 지불하도록 했다. 그 결과 상업과 무역이 활발해졌다.

 

해상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천주 항구에는 1만5000척의 선박이 해상 수송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역에서 거둔 세금과 수익은 거대한 제국을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먼 거리를 은화와 동전으로 다니는 것은 위험하고 불편했다.

 

본격적인 지폐 시대는 5대 황제 세조 쿠빌라이가 중상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제국 전역의 교역 속도를 높이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지폐 사용을 급격히 확대했다. 그는 은과 비단에 기반한 냥 단위의 교초(지원통행보초)를 발행하여, 은 1냥을 교초 10관으로 정해 유통하였다. 원나라의 교초는 동판으로 인쇄되어 황제의 옥새가 날인되었으며, "위조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로 인해 대량의 주조 비용이 절약되면서 상거래가 활발해졌다. 쿠빌라이 초기에는 금나라의 전례를 피하기 위해 지폐와 은의 교환 비율을 철저히 유지하며, 은을 확보한 만큼만 지폐를 발행했다. 원나라는 수도 연경에 조폐창을 두어 지폐 인쇄를 진행했다.

 

이로 인해 이슬람권과 몽골은 공통된 통화 기반을 갖게 되었고,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유라시아 지역이 모두 은을 기반으로 한 화폐경제 체제로 통합되었다. 교초는 고려에서 시리아까지 몽골의 영향권에 있는 모든 지역에서 통용되었다. 원나라는 지폐만 유통시키기 위해 모든 금은과 동전을 몰수하고 이를 지폐로 교환해주었으며, 지폐 수령을 거부하면 사형에 처해졌다. 송나라 때에도 지폐가 사용되긴 했지만, 이렇게 광범위한 지역에서 지폐만 통용된 것은 원나라 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원나라의 지폐 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아 '동방견문록'에서 지폐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종이가 돈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원나라가 남송과의 전쟁 및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해 막대한 재정 지출이 필요하자, 세금 징수로는 부족하여 지폐를 무분별하게 발행했다. 1274년부터 1281년 사이에 남송을 병합하고 고려의 2차 일본 침공으로 인해 고려에 엄청난 양의 원나라 지폐가 유입되었다. 과도한 팽창 정책으로 인해 원나라는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고, 은을 준비금으로 예치하지 않은 지폐가 남발되면서 사람들은 지폐를 은으로 교환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교초는 명목상의 화폐로 전락하고 위조 지폐가 등장하면서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통화 체계가 붕괴되며 시장경제는 마비되고, 사람들은 원시적인 물물교환으로 되돌아갔다.

 

이 정치혼란 속에서 어느덧 유럽에 유행하던 흑사병과 유사한 것으로 보이던 전염병이 중국에 유행하였고, 차례로 천재지변이 농촌을 황폐화 시켰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권력 다툼에 마음을 빼앗긴 권력자들은 이에 대한 유효한 대책을 충분히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내는 급속히 황폐화되고, 원나라의 지배 에 대한 한족들의 불만과 공업중시의 원나라의 정책이 만들어낸 경제착취에 괴로워하던 농민의 궁핍 등이 원인이 되어 지방에서는 급속히 불온한 움직임이 높아져만 갔다.

 

몽골 제국도 그리스와 로마 제국이 겪었던 길을 피하지 못했다. 이후 농민봉기와 주원장의 부상으로 1368년 몽골군은 몽골 고원으로 쫓겨나고 원나라의 지폐는 휴지처럼 되어버렸다. 이처럼 초인플레이션은 거대한 제국조차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원나라 금속화폐 마제은馬蹄銀

금속화폐의 중요성은 지폐의 남발이 더욱 크게 작용하였다 마제은(馬蹄銀)은 세계 각국의 독특한 화폐 중 하나로 이 화폐는 원나라(1271~1368) 말부터 명나라(1368~1644) 초에 걸쳐 주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은괴의 일종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서양에서는 사이시(sycee)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마제은은 다양한 중량으로 주조되었으며, 주조된 후에는 관에서 허가한 감정기관의 철저한 검사 과정을 거쳐 중량과 품위가 확인된 후 유통되었다. 이러한 마제은은 실질적인 가치를 지닌 금속 화폐로, 청나라(1636~1912) 시기에 가장 많이 주조되었다. 특히, 50냥(약 1,875g) 내외의 마제은이 널리 유통되었으며, 주로 고액 거래나 자산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비축 용도로 사용되었다.

 

마제은은 주로 중국 상인들에 의해 조선에도 거래했으며, 유통 지역은 중국 상인이 거주하는 지역과 평안도 의주, 압록강 상류 연안 등 접경 지역이었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위안스카이(袁世凱), 쩡루창(丁汝昌) 등이 군행 또는 사행으로 조선을 방문할 때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마제은을 가져오면서 유입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특히 1894년 청일전쟁 발발 당시에는 청나라의 군용 자금으로 대량이 유입되었다.

 

조선에도 마제은은 주로 부자들이 비축하였고, 일부는 국내 화폐 제조에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1882년(고종 19년)에는 최초의 근대 화폐인 대동은전(大東銀錢) 3종(대동1전, 대동2전, 대동3전)이 마제은을 원료로 하여 주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제은의 품귀 현상으로 인해 주조 원가가 상승하면서, 대동은전은 발행된 지 불과 8개월 만에 주조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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