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역사 15편 중국 근대사 조세제도
요
요 왕조는 이원 지배 체제를 통해 유목민과 정주민에 대한 세금 제도를 차별적으로 운영하였다. 건국 초기에는 기본적인 수준에서 세금과 공물을 징수했으나, 요 태조의 지시 아래 한연휘가 호구 조사를 실시하고 조세 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했다. 태종 대에는 당과 발해, 오대의 제도를 참고하여 조세 제도를 재정비하고 효율성을 높였다. 성종은 조세 제도의 개혁을 추진하며 토지와 재산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세금 대장을 새롭게 개정하였다. 그러나 세금 부담이 과중해져 인민의 불만이 커지자, 성종은 세금 감면 조치를 취하고 지역별로 조세와 요역을 상황에 맞게 부과하였다. 이로 인해 국가의 조세 제도가 더욱 완비되었다.
균요법(均徭法), 보갑법(保甲法), 관수관해, 강남의 징일법, 균전균역법(均田均役法), 하북의 십단법(十段法) 등이 명대 중, 후기에 시행한 대표적인 개혁책들이다. 이러한 지역 단위의 개혁이 이뤄지고 사회적 공감대가 생겨나면 여론의 영향을 받은 조정에서 여러 개혁책들을 비교, 분석하고 단점을 보완해 전국적으로 시행했다. 이렇게 전국화된 제도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강남의 징일법을 보완해 만든 일조편법(一條鞭法)이다. 반면, 요 왕조는 지역 단위의 개혁만 일부 이뤄졌고 황제들이 개혁안들을 거부하거나 체제 정비를 할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중흥을 이루지 못하고 멸망했다.
각 지방에 은패천사(銀牌天使)를 파견해 인민의 재산을 강탈하는 폐단이 있었다. 은으로 된 패(銀牌)를 차고 다닌다고 해서 은패천사라 불리는 이들은 지방 관료와 속부의 부족장들에게 특별세 납부를 강요하고 제대로 양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들에게 장형을 가했다. 심지어는 죄 없는 부호들의 재산까지 마구잡이로 강탈해서 원성이 높았다. 은패천사들 중에서 가장 악질은 여진족들이 사는 동부 지역으로 가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여진족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특산물과 재산을 강탈하고 부족장들에게 모욕을 주었으며 여진의 땅을 방문할 때마다 미녀를 요구하는 등, 온갖 패악질을 부렸다. 이러한 은패천사들의 만행은 여진족들의 반요 감정으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요가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개선된 폐단으로는 타초곡(打草穀)이 있다. 타초곡은 말 그대로 가축을 먹이기 위한 풀과 군인이 먹기 위한 식량을 빼앗는다는 것으로서 요 왕조는 군대를 일으킬 때면 군인들에게 타초곡을 허가해 민간인들에게서 물자를 강제 징발하거나 약탈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날 때면 타초곡에 대한 인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특히나 요 태종이 개봉을 함락하고 난 후에 허락한 타초곡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켜 후진의 한인들이 요에 저항하게 만들고 요군의 총퇴각을 야기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타초곡은 조정 내부에서도 곧잘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성종대에 인민에 대한 타초곡을 금지해 인민들의 불편을 없애 주었다. 그러나 성종의 금령 이후에도 몇 차례 타초곡을 행하는 일이 있어 폐단을 완전히 근절하지는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정리하자면, 요는 송보다 세금이 적은 편이었으나 갑작스러운 세금 징발과 과중한 부역, 정주민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할 수 있다. 성종대에는 여러 차례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세금 부담을 낮춰주어서 이런 문제점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흥종대부터 이러한 문제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사회적 모순과 세금 부담이 커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흥종은 여러 관료, 인사들이 세금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혁책을 올리는데도 사안을 무시해 해결할 시기를 놓쳐버렸으며 흥종의 뒤를 이은 도종과 천조제는 사치에만 몰두하여 요의 쇠퇴를 앞당겼다.
중국 근대사 중원의 민족 할거시대
중원의 장악하고 있었던 송나라의 군사제도는 위병제(傭兵制; 모병제)로 특징지어졌다. 송 태조는 금군(禁軍)의 제도를 개편하여 전군의 사령관직을 폐지하고 황제 직속의 장군을 두지 않았다. 북송 중기에 상비군이 140만 명에 달했지만, 이들은 실전 경험이 부족한 불안정한 병사들이 많았다.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송나라 군대의 전투 성과는 승리한 전투가 압도적으로 적었다.
송나라 군대는 보병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기병 위주의 요나라와 서하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140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비와 외세(요나라, 서하, 금나라 등)와의 평화 유지를 위한 세금이 국가 예산에 큰 부담을 주었다. 또한, 문인중시주의가 만연하여 무인은 경시되었고, "좋은 철은 못에 없고, 좋은 인간은 군대에는 없다"라는 속담이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병사 모집에도 어려움이 많아, 병사들은 죄인 출신이나 품행이 좋지 않은 자들로 채워지게 되어 사기와 규율이 저하되었다.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병사에게 문신을 실시하여 일반 백성과 구별하기도 했다. 당나라 시대에는 도시가 밤에 문을 닫고 출입을 금지했지만, 송나라 시대에는 이러한 규제가 사라져 카이펑의 거리에는 밤에도 상점이 가득하고 사람들로 붐볐다고 전해진다.
국방비의 증가와 대지주 및 대상인의 증가로 인해 세수 감소가 심각해지자, 개혁이 촉구되었다. 6대 황제 신종(神宗)은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국정개혁에 나섰고, 이를 신법(新法)이라 불렀다. 신법은 주로 영세 농민 보호와 대지주 억제를 목표로 했으나, 대지주와 상인 세력, 그리고 이들과 관련된 구법파 관료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들의 갈등은 점차 격렬해져 송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시기에 만주에서 여진족이 1115년 금나라를 세우고, 송나라는 금나라와의 동맹을 통해 요나라 공격을 약속했다(해상의 맹세). 1121년 요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송나라가 신흥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요나라의 잔당과 손을 잡은 사실이 드러나 금나라의 분노를 샀다. 결과적으로 1127년 카이펑이 금나라에 의해 함락되고 황제 흠종(欽宗)과 태상황 휘종(徽宗)이 포로로 잡혀갔다(정강의 변, 靖康之變). 흠종의 동생 조구(趙構)는 남쪽으로 천도하여 항주에서 황제로 즉위하게 되며, 이 이후 송나라는 남송으로 불리게 되었다.
몽골은 1234년 끈질긴 추적 끝에 금나라를 멸망시켰고, 이후 1235년 남송을 다음 목표로 삼아 전투를 시작했다. 몽골은 남송의 화북 침공인 ‘단평의 입락’을 이유로 병력을 보내 공격했지만, 남송의 방어가 예상보다 강력하여 몽골군의 진격이 저지되었다. 1241년 우구데이 칸의 사망으로 전쟁은 일단 중단되었다. 1258년, 몽골은 사천의 조어성을 배경으로 두 번째 침략을 감행하였다. 뭉케 칸이 직접 공격에 나섰으나, 그 과정에서 사망하게 되었다. 이때 쿠빌라이가 양자강 중류의 악주를 공격했지만, 뭉케의 죽음으로 인해 중앙 정세가 불안해져 철수하게 된다. 쿠빌라이는 1260년 쿠릴타이에서 후임 칸으로 선출된 후, 국내 문제를 해결하고 남송을 다시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1268년, 쿠빌라이가 남송을 재차 공략하였고, 1273년 2월 요충지인 양양을 점령하여 양자강을 세력권에 넣게 된다. 양양의 함락은 남송의 멸망을 예고했으며, 몽골의 기마병에 대한 저항 수단이 사라졌다. 1276년 수도 임안이 함락된 후 남송은 망명정부 형태로 간신히 존속했지만, 최후의 재상 문천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곧 패망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남은 송의 잔존세력은 홍콩 광주만의 애산에서 저항했으나, 쿠빌라이의 군대에 패배하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문천상은 붙잡혀 투항을 권유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사형에 처해져, 1279년 남송은 최종적으로 멸망하게 된다.
중국 근대사 중원의 당시 화폐 역사
송나라 고종이 남쪽으로 천도한 이후, 화폐 제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송나라는 본전의 액수를 줄이고 회자라는 어음을 사용하여 금융 거래를 활성화했다. 이후 금나라는 이러한 방식을 본받아 교초라는 지폐를 발행하게 되었고, 원나라 또한 이를 이어받아 중통원보초라는 지폐를 만들었다.
송나라의 화폐는 주로 종이로 제작되었고, 도장 무늬로 글자를 새겼다. 반면 금나라와 원나라의 화폐는 뽕나무 껍질로 만들어졌으며, 글자 무늬를 찍어 사용했다. 그러나 화폐 제작 비용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높은 가치를 지닌 물건을 구매하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물가 상승과 백성의 생활 고난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돈의 완전한 폐지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금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왕조로, 처음에는 동화를 기본 통화로 사용했다. 그러나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북 지방을 점령한 후 구리 화폐가 부족해지자 1142년에 처음으로 지폐를 발행하게 되었다. 이 지폐는 비단을 보증 수단으로 삼았다. 이후 금나라의 해릉왕 시기에는 교초라는 지폐가 발행되었고, 금은 동화와 함께 은화를 발행하기도 했다. 금의 은화 중에는 승안보화와 말발굽형 원보은이 있다.
금나라의 교초는 처음에는 7년의 유통 기간을 두었으나, 1189년에는 유통기한이 폐지되어 영구 통화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폐가 남발되었고, 특히 금나라가 남송과의 전쟁과 북쪽 몽골과의 대치 과정에서 통화 팽창이 심화되었다. 말기에는 1,000관 짜리 지폐도 발행되었고, 1214년에는 심각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새로운 지폐인 보천이 발행되었으나, 시장에서 외면당했다.
결국 사람들은 지폐 대신 은과 금을 선호하게 되었고, 지나치게 발행된 지폐는 금나라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금나라는 1234년에 몽골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고, 남송 시기에는 쓰촨 지역에서 회자라는 지폐가 사용되었으나, 이는 지역 통화로 제한되었다. 이러한 화폐 제도의 변화는 당시 경제 상황과 정치적 맥락을 반영하며, 후에 이어지는 중국의 화폐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