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역사 14편 중국 근대사 조세제도
수
수문제가 시행한 토지세는 소규모 자작농을 대거 증가시키고, 삼장제와 균전제를 확립하는 등 중요한 성과를 이룩했다. 조세를 감면하고 하사물을 풍성하게 지급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고에는 재화가 넘쳐흘러 보관할 곳이 부족할 정도였다. 수문제가 즉위 초기에는 집계된 민호가 400만 호에 미치지 못했으나, 재위 말년에는 890만 7,000여 호인 606년, 추정 인구 4,600만 명 증가하는 하였다. 이러한 토지 정책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 시기까지 지속되었으며, 통일 왕조들이 채택한 토지 정책의 기초로 작용하였다.
수문제는 사치를 줄이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세금을 줄여주었고, 어떤 해에는 아예 세금을 징수하지 않았다. 또한 지방까지 관리를 파견하고 500가를 향으로, 100가를 리로 조직하여 통치 체계를 한 차원 높게 끌어올렸으며, 어느 정도 제국의 기틀이 잡히자 관료들에게도 따로 경비를 마련해 주어 관료들과 귀족들이 함부로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했다.
수 양제는 황제가 된 이후에 대운하를 포함한 여러 대규모 토목사업을 추진하며, 지방을 유람하는 데에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았다. 이러한 집권 세력의 호화로운 생활과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은 가혹한 세금과 부역의 징발로 고통받았고, 결국 생활이 파탄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612년, 수양제가 고구려와의 첫 전투에 나설 당시, 산둥성에서 왕박이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켜 수 왕조에 대항했다. 수나라의 멸망 원인 중 하나는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해 국력을 낭비한 것이며, 이는 동북아시아 패권을 놓고 벌어진 갈등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고 분석된다.
당
당나라는 618년에 건국되어 209년간 20명의 황제를 거치며 성장했다. 합리적인 인재 등용과 효율적인 토지 제도로 급속히 발전하였고, 유가문화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도 수용하여 문화적으로 번영했다.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으로 서양 문물도 흡수하며 동아시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당나라의 토지제도는 균전제(均田制)로, 15세 이상의 인구 수에 따라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주고 이를 바탕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농민들이 상업 활동에 참여하거나 부호들이 토지를 구매함에 따라 균전제는 더 이상 효율적인 제도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
재정이 악화되면서 당나라는 재정과 국방 등 전반적인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보유한 토지와 재산, 생산량에 따라 연 2회 세금을 납부하는 양세법(兩稅法)을 도입하고, 이를 현금으로 납부하는 금납제를 시행했다. 하지만 농민들은 세금을 현금으로 내기 위해 수확한 농산물을 시장에서 판매해야 했고, 당시 당나라는 시장경제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 거래 과정에서 손실이 자주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금납제가 재정 수입에 큰 도움이 되지 않자, 당나리는 주요 생필품인 소금을 정부가 독점 판매하는 전매제를 도입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소금 전매제도는 당나라의 조세 수입 회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부는 시장가격이 100원인 소금에 소비세를 붙여 3000원에 판매함으로써 조세 수입을 증가시켰다. 소금은 필수품으로 수요가 가격 변화에 민감하지 않아, 소비자들은 높은 가격에 소금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소금에 대한 세금 부담은 소비자에게 전가되었고, 한때 조세 수입의 50% 이상이 소금 전매 수입에서 발생했다.
비탄력적인 재화에 세금을 부과하면, 이들 재화의 경우 세금이 추가되더라도 시장에서의 거래량이 크게 감소하지 않기 때문에 세수가 늘어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소금 가격이 생산원가의 30배 이상으로 상승하면서 암시장이 생기고 밀매가 성행했다. 소금 밀매업자들은 가격을 높이기 위해 매점매석을 하였고, 정부의 단속이 강화되자 이들은 조직을 결성하여 항의했다. 이러한 항의는 결국 '황소의 난'으로 발전하였고, 밀매업자인 황소는 왕선지와 함께 수도 장안을 쉽게 함락시켰다. 이는 소금세에 대한 반발뿐만 아니라, 가뭄과 수해로 인한 백성들의 불만이 결합된 결과였다.
안사록의 난(755-763년)은 당나라 후기에 발생한 대규모 반란으로, 정치적 부패와 외척 및 귀족의 권력 강화, 세금 부담으로 인한 사회적 불만이 주요 원인이었다. 호적에 등록된 백성만 조세와 군역을 부여받을 수 있는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농민들은 명목상으로 토지를 부여받았으나, 인구 증가로 실제로 받은 토지는 적었고, 그에 따른 부담이 과중했다. 주요 문제로는 무보수 자비 부담으로 변방으로 끌려가는 것, 지속적인 세금 부담, 지방 토산품의 강제 징수, 각종 잡세와 임시세금의 압박이 있었다
안록산은 군사적 불만을 결합해 반란을 일으켰고, 755년 수도 장안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반란으로 인해 당나라는 큰 혼란과 인명 피해를 겪었고, 군사 체제를 개편하게 되었으며, 결국 당나라의 힘이 약화되어 송나라와 같은 새로운 왕조의 등장을 촉진했다. 이는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황소의 난(黃巢之亂)은 875년부터 884년까지 중국 당나라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란으로, 황소(黃巢)가 주도했다. 이 반란은 당나라의 전성기가 끝나가고 있던 시기에 일어나,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만이 쌓여 있던 상황에서 촉발되었다. 당시 소금은 국가의 전매품으로, 재정 악화로 인해 가격이 급등했다. 이에 따라 소금 밀매업자들은 정부 가격보다 저렴하게 소금을 판매하여 이익을 얻고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소금 밀매가 성행하면서 관련 조직이 형성되었고, 정부는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소금값을 대폭 인상했다. 이 과정에서 밀매업자들을 단속하기 시작하자, 복주(하남성)의 소금 밀매업자 왕선지가 874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다른 지역의 밀매업자들도 이에 동참하여 대규모 반란으로 확산되었다. 당나라 정부의 부패와 무능력이 심화되었고, 외척과 귀족의 권력이 강화되어 일반 백성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군사 제도와 군비 부담의 불균형으로 인해 군대의 전투력이 약화되었고, 지방 군벌의 세력이 커졌다.
반란의 전개 황소는 875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그의 군대는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여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 반란군은 수도 장안(長安)까지 진격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폭력과 파괴가 발생했다. 반란이 진압된 후 당의 권력 구조가 크게 변화하였고, 지방 군벌의 힘이 강화되었습니다.
황소의 난은 당나라 왕조의 사실상 붕괴를 초래하여, 춘추전국시대의 주(周) 나라처럼 지방 정권으로 전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반란은 당나라의 멸망을 가져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907년에는 황소군 출신의 주온이 당나라를 완전히 무너졌다.
송
송나라 정부는 쓰촨 지방에서 이중 통화를 폐지하고 세금을 동전으로 납부하도록 하였으나, 동전이 원천적으로 부족했던 쓰촨에서는 세금 납부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송 조정은 곧 쓰촨 지역을 이전의 철전제로 돌아가게 하였고, 이는 제국 전역에 통일된 화폐 제도를 수립하려는 목표와는 달리 송나라 역시 이중 통화를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철전 사용은 중대한 결함이 있었는데, 철전의 가치는 같은 양의 동전보다 1/10 이하로 평가되어 일반인과 상인 모두에게 거래 시 큰 부담이 되었다. 이에 따라 9세기 초반, 당나라 정부는 장안과 쓰촨을 오가는 상인들에게 '비전(飛錢, Feiqian)이라는 약속어음을 발행하여 유통하도록 하였고, 송나라에서도 이를 계승하여 초기에는 동전 단위로 표시된 '편전(便錢, Bianqian)'이라는 약속어음을 발행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송나라는 양자강 하류에서 징수된 세금은 송나라 국가 재정의 40%를 차지하며, 이는 약 1,250만 석에 해당합니다. 1 석이 50kg인 것을 고려하면, 180kg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337만 석이 됩니다. 만약 전체 곡물 생산량이 이 세금의 10배에 해당한다면, 송나라의 총 곡물 생산량은 약 3,300만 석에 달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의 도쿠가와 시대 이전에는 곡물 생산량이 3,000만 석을 넘지 못했으며, 1620년에는 2,700만 석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송나라의 농업 생산량이 일본보다 훨씬 더 높았음을 나타낸다.
송나라 정부는 민간 경제 활동을 촉진하고, 과도한 세금이 경제 활동을 위축시키는 것보다 자주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해외 무역에 나간 배가 1년 만에 돌아오면 정상적인 세금을 부과했지만, 5개월 이내에 귀국하면 세금을 감면해 주었다. 반대로 1년이 넘으면 관료들이 조사를 실시했다. 이러한 정책은 경제 활성화를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국가가 민간의 경제활동에 지나치게 개입하거나 세금을 과도하게 부과할 경우, 경제가 위축될 수 있음을 우려한 것 같다. 송나라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매우 균형 잡힌 정책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한 연구에 따르면, 송나라가 교역 상품에 부과한 세금은 2~5%에 불과했다고 한다. 국가의 관리와 통제가 어려웠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높은 과세 수준으로 평가되기 어렵다.
중국 근대사의 조세 제도 결과
조세 제도는 국가의 재정 운영과 사회 안정에 필수적인 요소로, 각 왕조의 경제적 성공과 실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나라의 경우 수문제 치세에는 세금 감면과 효율적인 토지 정책이 농민을 지원했지만, 후에 수양제의 사치와 전쟁으로 인해 재정이 악화되고 반란이 발생했다.
당나라는 이미 세제 개혁을 통해 다양한 세금 제도를 개발하고, 양세법에 따라 정부가 연간 예산을 세우는 선진적인 재정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튼튼한 국가 재정 덕분에 안록산의 난과 같은 큰 사건을 겪고도 쉽게 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나라의 세금 제도는 세수 확충에만 집중되어, 국민들의 세금 부담 능력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당나라가 세금 제도에 가격 탄력성 개념을 적용하여 국민들의 세금 부담 능력을 반영한 합리적인 세금 체계를 운영했다면, 생필품인 소금에 대한 지나친 과세로 인해 멸망을 자초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경우, 당나라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실크로드를 통해 동아시아가 아닌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송나라는 민간 경제 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세금을 자주 부과하고 과세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경제 활성화를 꾀했다. 이처럼 조세 제도는 국가의 재정 안정성, 사회적 불만 해소, 경제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효과적인 조세 정책이 국가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핵심 요소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