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의 발달 과정 일본 근대사4 금융 근대화 내용
"만연 화폐 개주(万延貨幣改鋳)"는 만연 원년(1860)에 에도 막부가 시행한 화폐 개주 정책으로, 일본과 미국 간의 화친 조약에 따라 소반(금화)의 대량 유출로 인해 기존보다 금의 함량을 줄인 소반을 주조한 것이다
에도 막부는 1856년 '안세이의 개주(安政の改)'를 통해 '니부반킨(二分判金)'을 주조하였고, 1859년에는 고반, 이치부반킨, 초긴, 마메이타긴을 개주했다. 1868년 미일 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자유무역이 시작되면서, 서양의 은과 에도의 은화 교환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이치부 긴(一分銀)을 주조했다. 1860년에는 오반, 고반, 이치부, 니부반킨, 니슈킨(二朱金)을 개주하였으며, 이를 '만엔의 개주(万延の改)'라고 한다. 에도 막부는 초기에는 탄압적인 무단정치를 시행했으나, 이후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여 문치정치로 전환하였다. 이로 인해 상업과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고 일본인들의 생활이 향상되었다.
막부는 화폐 주조권을 독점하여 증가하는 상품 유통에 대응하고 재정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다양한 금화, 은화, 전화를 주조하여 전국적으로 유통시켰다. 이러한 화폐 유통량의 증가는 금융 신용제도의 발전을 가져왔다.
에도막부는 1856년 '안세이의 개주'를 통해 '니부반킨'을 주조하고, 1859년에는 고반, 이치부반킨, 초긴, 마메이타긴을 추가로 주조했다. 1868년 미일 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자유무역이 시작되면서, 서양의 은과 에도의 은화 교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이치부 긴을 주조했다. 또한 1860년에는 오반, 고반, 이치부, 니부반킨, 니슈킨을 개주하였고, 이를 '만엔의 개주'라고 부른다.
일본 근대사 신용 사회 과정
막부는 제3대 쇼군 이에미츠 이후 문치정치로 전환하여 경제 발전을 도모했다. 화폐 주조권을 독점한 막부는 상품 유통 증가에 대응하고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시켰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통일된 본위 화폐제도가 없었고, 지역별로 금본위제와 은본위제가 혼재하였다. 이로 인해 환전업이 발달하고, 금융업도 성장했다.
상업 자본이 성장하면서 고노이케, 스미토모, 미쓰이와 같은 큰 상인들이 등장하였고, 이들은 금융업에도 진출했다. 상업 자본의 성장은 초닌 계급의 지위를 높였으나, 무사 계급의 지위는 하락하게 되었다. 결국, 막부의 재정은 궁핍해졌고, 이로 인해 화폐 품위를 떨어뜨리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막부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중세 봉건제도를 흔들며, 초닌 계급이 근대 국가로의 이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화폐 유통의 확대
막부는 상품 유통 증가에 따라 화폐 유통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다양한 금화와 은화, 전화를 주조하였다. 에도를 중심으로 한 관동 지역에서는 금본위제 가, 오사카를 기반으로 한 관서 지방에서는 은본위제가 성립되어 있었지만, 법정 비율은 시세에 따라 변동했다. 이러한 불안정한 환율로 인해 금, 은, 전화를 환전하는 업무가 필요해졌고, 이들은 환전뿐만 아니라 예금, 대출, 어음 발행 등 다양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다.
환전업의 발전
환전업은 주로 에도와 오사카에서 크게 발전하였으며, 일반 상인뿐만 아니라 다이묘와 무사들에게도 대부를 제공하는 다이묘가시가 이루어졌다. 지역 내에서는 어음에 해당하는 데가타(手形)가 사용되었고, 에도와 오사카 간의 거래에서는 환어음인 가와세(替)가 활발히 이용되었다. 이러한 환전업의 발전은 상업 금융 제도의 기초를 마련하고, 상업 자본의 성장을 촉진했다.
상업 자본의 성장
에도와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서는 고노이케(鴻池), 스미토모(住友), 미쓰이(三井)와 같은 호상이 성장하였다. 고노이케는 양조업과 해운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고, 1656년부터 금융업에 진출하여 다이묘가시에 전념했다. 스미토모가는 1691년 동산 개발에 성공하여 대자본가로 성장하였고, 미쓰이가는 의류 상점을 개업한 후 금융업에 진출하여 18세기 중반에는 거대한 금융가로 발전하였다.
사회경제적 변화
이러한 상업 자본의 성장은 초닌(商人) 계급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높이며, 반면 무사 계급의 지위는 추락하게 되었다. 에도막부의 재정은 궁핍해졌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화폐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화폐 정책은 막부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중세 봉건제도의 기반을 흔들어 무사들의 정치적, 경제적 입지를 좁히게 만들었다.
초닌 계급의 역할
반면, 경제의 주체로 부상한 초닌 계급은 일본의 근대 국가로의 이행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일본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나갔고, 막부의 전통적인 권위와 질서를 도전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에도 시대의 화폐 유통과 금융 제도의 발전은 일본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막부의 화폐 정책과 상업 자본의 성장은 초닌 계급의 부상을 촉진했으며, 이는 일본이 근대 국가로 이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으며, 당시의 경제적 구조와 사회적 관계를 재편하는 데 기여하였다.
일본 근대사 경제 정책과 금융 상황
에도 시대의 사회는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구분되었으며, 이는 법적으로 엄격히 지켜졌다. 무사는 에도 사회의 지배자로서 에도 막부에 의해 소비 계급으로 남아 있었으나, 화폐 경제의 발전으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고, 상인들의 자본에 의존하게 되었다.
농민은 조세를 부담하는 중요한 존재였으나, 영주에 의해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이로 인해 농민의 생활은 가장 어려운 상황에 놓였으며, 농토에서 벗어나는 것이 금지되었다. 막부는 농촌을 유지하고 농민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다양한 규제를 시행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적인 토지 검사는 완성되지 못했으나, 이후 에도 막부가 이를 이어받아 토지 검사 제도를 완성했습니다. 이 검사의 목적은 조세 징수의 기초가 되는 토지 구분과 표준 수확량인 다카(高)를 측정하고, 조세 부담자인 농민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토지 검사는 마을 단위로 진행되어 촌 단위의 생산량인 무라타카(村高)가 설정되었다.
에도막부 시대의 채권 및 채무에 대한 법적 체계와 그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혼쿠지 채권과 가네쿠지 채권의 차이점, 그리고 이들에 대한 법적 보호의 강도 차이를 중심으로 서술된다. 혼쿠지 채권은 물적 담보를 제공받는 채권으로, 채권자가 법적으로 보호받는 반면, 가네쿠지 채권은 물적 담보 없이 이자가 붙는 채권이다. 에도막부는 혼쿠지 채권에 대해 강력한 보호를 제공했지만, 가네쿠지 채권의 경우 채권자의 보호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가네쿠지 채권에서는 소송 제기 시 최저액의 제한이 있었고, 당사자 간의 원만한 해결을 권장했다. 이로 인해, 채무가 이행되지 않았을 경우에도 채권자는 법적 구제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혼쿠지 채권의 경우, 채무자가 기한 내에 변제하지 않으면 담보로 잡힌 토지나 가옥이 채권자에게 인도되는 반면, 가네쿠지 채권은 30일 이내의 변제를 명령받고 기한 내에 변제하지 않을 경우 바로 파산 절차로 넘어가게 된다. 이는 가네쿠지의 채권 보호가 약한 이유로, 채권자와 채무자 간의 신의를 바탕으로 한 계약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가네쿠지 소송이 증가하자 에도막부는 혼쿠지 소송이 방해받는다고 판단하여 ‘아이타이스마시레이’를 발표, 가네쿠지 소송을 재판소에서 심리하지 않고 당사자끼리 해결하도록 했다. 이는 채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변제하지 않는 한 채무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이러한 채무는 자연채무로 간주되며, 강제집행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채무는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에도막부 시대의 채권 제도는 계약의 신의를 중시했으며, 채권자와 채무자 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에도 막부는 주요 광산을 통제하여 재정을 충당했으나, 금과 은의 생산량 감소로 인해 부유한 초닌들에게 고요킨(御用金)을 강제로 부과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공채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며, 원금 회수조차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막부는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교호개혁(享保改革)의 일환으로 1722년부터 조멘도리(定免取)를 실시했다. 이 제도는 조세율을 일정 기간 동안 고정하여 농민의 노동 의욕을 높이고 생산력을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전에는 농민이 관리에게 뇌물을 제공하여 연공이 감소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조멘도리의 도입으로 연공 수입이 증가했다.
에도 막부는 쌀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오사카를 중앙 시장으로 발전시켰다. 막부는 오사카에 쌀 창고를 두어 생산된 쌀의 약 10%를 상품화하고 화폐로 전환했다. 구라야쿠닌 대신 초닌 구라모토가 연공미를 관리하게 되면서, 쌀은 현물 거래가 아닌 수표 형태로 거래되는 변화가 발생했다. 이를 구라고메킷테(米切手)라고 하며, 오사카는 증권 시장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일본 근대사 정리하기
막부는 오사카 상인을 육성하고 통제 정책을 병행하여 상업 거래의 질서를 설정했다. 가부나카마(株仲間) 결성을 허용함으로써 상인들의 협조를 얻어 화폐 유통과 물가 통제를 실현하려 했다. 따라서 오사카의 상업 발전과 초닌의 성장은 막부의 정치적 맥락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도 시대의 상거래는 발전했지만, 막부는 지나치게 발달하여 봉건제를 파괴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이는 막부의 쇄국 정책이나 가부나카마 조직의 해산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채무 소송이나 당사자 간 합의를 유도하는 정책에서도 이러한 의도가 드러난다. 막부는 채무 관련 재판을 ‘혼쿠지(本公事) 채권’과 ‘가네쿠지(金公事)’ 채권으로 나누어 처리하였다. 혼쿠지 채권은 물적 담보를 정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체계는 에도 막부의 재정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에도 막부 시기의 경제정책은 일본의 경제 구조와 사회적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막부는 안정된 정치적 환경 속에서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경제적 불균형과 양극화 문제를 야기했다. 특히, 수도권과 지방 간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지방 경제가 소외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17세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상업이 발전하여 도시가 성장했지만, 이러한 발전은 막부의 재정에 부담을 주었다.
농민과 상인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막부는 화폐 개혁과 상인들에게 대부금의 지급을 압박하는 등의 방법으로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책은 물가 불안정을 초래했고, 상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에도 시대의 경제 정책은 상인들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이는 경제적 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에도 시대의 금융업과 상업적 관계의 발전은 일본 경제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지방 소멸과 같은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사에 초석이 되어 메이지 유신의 거름이 되었다고 정의내린다.